해방 78돌 특별기획 ②-김좌진의 새 부인, 1926년에 홍성출신 19살 김영숙 만나
상태바
해방 78돌 특별기획 ②-김좌진의 새 부인, 1926년에 홍성출신 19살 김영숙 만나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8.26 08: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해림시 산시진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운영하던 금성정미소.이곳에서 배신자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했다.
중국 해림시 산시진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운영하던 금성정미소.이곳에서 배신자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했다.

■ 김좌진 참모들 ‘팔로’
동서고금에서 출중한 명장일수록 천하 유능한 모사들을 찾아내 모시기를 원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 세 번이나 친행했다는 이야기도 오늘까지 전해지는 미담이 아닌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 무장투쟁의 선두에 선 김좌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산시(북만주)에 있을 때는 모사 여덟 명을 받들었는데 그들을 ‘팔로(八老)’라고 불렀다.

팔로들의 경력은 상세히 모르나 산조의 말에 따르면 영향력이 대단했다. 특히 어린 산조의 성장에 팔로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산조는 지금도 팔로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감정의 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산조는 이렇게 말했다.

“김좌진은 여덟 분의 모사를 모셨는데 모두들 팔로라고 불렀다. 이름이 다 기억되지는 않는다. 정해식, 이달문, 김기철, 이덕수, 장기덕 등이다. 이들은 김좌진보다 평균 스무 살쯤 많았다.”

“김좌진은 팔로들 앞에서 항상 머리를 숙였고 그들의 분부를 명심했으며 외출에서 돌아오면 팔로를 찾아 문안 올린 다음에야 제 일에 착수했다. 팔로들은 김좌진을 도와 많은 일을 했고, 그가 사망한 뒤 후사를 도맡아 처리했다. 이들은 김좌진을 살해한 자들이 무덤까지 파헤칠 것을 염려해 꼬박 4년간 비밀 보초를 섰다.”

 

■ 새 부인 김영숙
“김좌진이 해림에 있을 때 팔로의 좌상인 정해식 노인 댁에 묵었다. 팔로들은 독신으로 뛰어다니는 김좌진의 건강을 염려해 조선에 있는 본부인 오숙근을 모셔오려고 인편에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오숙근은 만주로 올 수 없는 형편이라고 소식을 전해왔다. 팔로들은 재차 연락을 하면서 두 해나 끌었으나 오숙근은 끝내 오지 않았다. 오숙근이 오지 않으니 이곳에서 새 부인을 찾아 가정을 꾸리도록 팔로들은 토론했다.

1926년 말의 어느 하루, 정해식 노인이 김좌진을 불러앉히고 타산을 털어놓았다.

‘자네 홀아비 신세로 뛰어다니는 것을 민망스러워 못 보겠네. 오숙근은 2~3년 기다려도 오지 않지. 그렇다고 자네가 언제까지 늙은이들 집에 얹혀살겠나. 내 생각에 자네 마땅한 여인을 얻어 살림을 꾸리도록 하세.’

김좌진은 펄쩍 뛰었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언제 부부 정을 나눌 새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사도 없이 훌쩍 나갔다. 김좌진이 팔로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절 없이 행동한 것이었다.

그날 저녁 김좌진은 좌상 앞에 무릎을 꿇고 낮의 무례를 빌었다. 정 노인은 넓은 도량으로 분을 삭이고 다시 한번 설득했다. 김좌진은 끝내 동의했다.

이렇게 맞은 새 부인이 1926년에 19살 처녀인 김영숙이었다. 김영숙은 김좌진과 한 고향(충남 홍성)이었다.

김영숙의 부친은 3·1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가 왜경에게 맞아 순국했다. 모친은 이를 악물고 영숙이를 공부시켜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모친도 병으로 숨져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다.

오빠 김영기와 남동생(이름 미상) 세 식구가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좌진을 하늘처럼 여기는 터라 그를 찾아 만주로 갈 것을 권고했다. 그리하여 3남매는 오직 김좌진이 있는 곳을 물으며 찾아왔던 것이다. 김영기는 오자마자 신민부의 별동대에 들어갔다.

팔로들이 눈여겨 김좌진의 새 부인감을 물색하는 요긴한 때, 김영숙이 나타났다. 지식 있고 얌전하고 알뜰한 김영숙은 팔로들의 마음에 들었다. 팔로들이 주선해 두 사람은 단오(1927년 6월 1일, 음력 5월 2일)를 이틀 앞두고 간소한 성례를 치렀다. 김좌진의 신변을 조석으로 보살필 사람이 생겨 팔로들은 한시름 놓았다.”

김영숙은 고국에 엄연히 본처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김좌진의 새 아내가 된다는 것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깊어가면서 김영숙은 고국에 있는 김좌진의 본처 오숙근에게 조심스럽게 편지를 보냈는데, 생각 밖의 답장을 보내왔다.

‘보내준 편지 잘 받았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김 장군의 아내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란 많은 이 세월에 당연히 아내 된 제가 장군님 곁에 있어야 하고 늙으신 시어머님을 모셔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말로만 아내일 뿐 저는 자격이 없는 몸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셔서 장군님과 시어머님을 제 대신 잘 모셔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이처럼 김좌진의 본처인 오숙근은 성격이 활달하고 시원시원했다. 오숙근은 김영숙이 김좌진의 아내가 되는 것을 적극 찬성했다. 

팔로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주선으로 김영숙과 재혼을 하고 해림의 정해식 노인의 집에 신방을 차렸으나, 김좌진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한가로이 신혼생활을 지낼 처지와 형편이 되질 못했다. 해림에서 반나절 거리인 영안현 산지진에 위치한 산시역 정미소에 독립군 본부를 두고 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서로 떨어져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아내 김영숙은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계속>

 

금성정미소 내부 모습.
금성정미소 내부 모습.
중국 해림시 산시진의 백야 김좌진 장군 구거 정문.
중국 해림시 산시진의 백야 김좌진 장군 구거 정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