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78돌 특별기획 ①-“나는 김좌진 장군의 친딸, 산조” 1995년 광복 50주년 이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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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8돌 특별기획 ①-“나는 김좌진 장군의 친딸, 산조” 1995년 광복 50주년 이후의 기록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8.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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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 ‘친딸’ 주장 ‘산조(山鳥, 김강석, 김순옥)’ 나타나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행사 해외독립 유공자로 초청받아
아버지 묘소에 성묘도 못하게 출국 ‘장군의 딸 아닐 가능성’
김좌진 장군의 딸 산조 씨가 90년대 초 장군의 암살지인 산시의 정미소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1995년 광복 50주년 당시에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해방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만주항일독립투쟁의 영웅으로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백야 김좌진(金佐鎭, 1989-1930) 장군과 관련된 ‘친딸’이라고 주장하는 ‘산조(山鳥, 본명 김강석, 김순옥)’가 나타나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이 무렵 우리나라의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며 집중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학자와 언론계, 중국 연변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강용권 연구원과 안화춘 연구원 등을 비롯해 연변대학교 등 학계의 역사학자들도 각종 관련 저술과 논문, 자료, 현장 발굴에 나서는 등 관심을 보였다. 해방 78돌을 맞아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고 관련된 저술과 문헌 등을 통해 백야 김좌진 장군의 발자취를 새롭게 따라가 보기로 한다.

1995년 당시 김강석(산조, 김순옥)은 광복 50주년 기념행사 때 해외독립 유공자로 초청받아 우리나라에 왔다. 그러나 막상 정부는 아버지 묘소에 성묘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출국시켰다.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이라고 초청은 했으나, 장군의 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 묘소에 엎드려 평생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이 울어보고 싶었던 그녀 ‘산조(山鳥, 김강석, 김순옥)’는 슬픔과 눈물 속에 절망하고 만다.

그렇게 중국 땅 해림시의 목단강으로 돌아간 ‘장군의 딸, 김강석’은 오랜 지병인 관절염과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결국 지난 2003년 9월 14일 75세의 나이로 아버지 백야 김좌진 장군이 순국한 흑룡강성 해림시에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목단강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1930년 1월 29일 음력 설을 앞두고 백야 김좌진 장군이 산시의 금성정미소에서 피살된 이후 처음으로 조선인들은 만주 땅에 남아있는 장군의 딸 강석을 찾게 된다. 당시 김강석(순옥)은 김좌진 장군이 정식으로 결혼해서 낳은 유일한 피붙이였기 때문이다.

1995년 당시 김좌진 장군의 유일한 피붙이로 생존했던 친딸 ‘산조(山鳥, 본명 김강석, 김순옥)’는 68세의 나이로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살고 있었다. 당시 연변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강용권(52·연변조선족 사학자) 연구원은 지금까지 덜 알려졌던 김좌진의 참모진 및 영안현 일대에서의 활동 등을 산조 씨의 증언에 기초해 1992년 218일에 걸쳐 중국 동북 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을 돌며 답사와 증언·채록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라는 글이 국내 언론에 실렸다. 

“산조 씨는 김좌진이 암살될 때 3살이었지만 성장하면서 그의 참모들로부터 당시의 전말을 생생히 전해 들었다. 박영석 교수(건국대·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연구에 따르면 김좌진은 산조 씨의 어머니 김영숙 외에 세 사람의 부인이 더 있었다.”며 글을 시작한 강용권의 글이다.

처음 김좌진의 딸을 만난 것은 1990년 6월 11일이었다. 이날 나는 목단강시 조선족문화관에 근무하는 강신극 선생을 찾아갔다. 역사 조사를 위해 강 선생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김좌진의 활동을 이야기하던 강 선생이 “김좌진의 딸이 지금 목단강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예?”

나는 너무도 놀랐다. 김좌진의 딸이 출현하다니? 왜 여지껏 잠겨 있다가 오늘에야 공개되는가? 

“친딸이랍니까? 연세는 얼마입니까?”

“친딸이 맞답니다. 금년에 예순서넛 됐을 겁니다.” 이리하여 이날 오후 김좌진의 딸 산조(山鳥·본명은 강석, 현재는 순옥이란 이름을 쓰고 있음)를 방문하게 됐다.

첫인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산조는 우리를 매우 의아한 눈길로 훑어봤고 묻는 말에도 한마디로 끊을 뿐 좀처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말을 꺼내는 법이 없어 한동안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찾아간 손님을 두고 침묵하는 것은 무언의 축출령이 아닌가.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나의 직업과 김좌진의 사적을 조사 중이라는 점을 말했다. 산조의 찬 눈길에 조금 온기가 도는 듯했다. 계속 밀어붙였다.

내가 산시에 갔을 때 마을 노인 말씀이 김좌진의 친척이라는 여인이 어린 딸을 데리고 산소에 다녀간 적이 있는데, 가목사에 집이 있다고 해 내가 연길에 돌아온 뒤 가목사 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띄운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 회답이 왔습니까?”

산조의 호기심에 찬 물음, 입가에 어떤 확인을 나타내는 미소가 어렸다.

“지금까지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나입니다.”

화기가 돌았다. 대화는 이렇게 이어져 엉킨 사연을 털어놓는 이야기가 시작됐다. 일단 봇둑이 열리자 홍수처럼 많은 사연이 쏟아져 내렸다. 이런 이야기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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