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의병기념관, 전라좌의병·해상의병의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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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의병기념관, 전라좌의병·해상의병의 거점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09.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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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6〉
보성군 노동면 누운재길 죽천 박광전의 용산서원 인근에 건립된 보성의병기념관.

의향(義鄕) 보성, 의병 정신 이어가기 위해 777명의 의병을 발굴해
보성의병기념관, 의(義)로써 일어난 선인들 선양 위해 2020년 개관
임진왜란 발발,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 대승의 상징적인 곳 ‘보성’
의병 활동한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전국 유일의 머슴 출신 의병장

 

전남 보성은 예로부터 충의 열사를 많이 배출해 의향(義鄕)이라 하고, 서편제 보성소리 등 민족음악이 살아 숨 쉬는 예향(藝鄕)이라 하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우리나라 최대의 차 주산지인 다향(茶鄕)의 고장이라 했다. 보성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이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의향(義鄕) 보성은 외침을 막기 위한 의병들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싸웠거나 해당 문화유적이나 선양사업이 있는 777명의 의병을 조사·발굴해 지난 2018년에는 ‘보성의병사’를 발간했다. 보성 의병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경우 온 가족이 스스로 나섰으며, 시대가 바뀌어도 그 후손들은 국난극복을 위해 다시 나섰다. 또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총칼의 찔림과 굴욕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죽천 박광전의 유적지인 용산서원 인근 터에 ‘보성의병기념관’을 건립하고 의(義)로써 일어난 선인들을 기억하고 선양하고자 지난 2020년에 개관했다. 보성군은 최근 다양한 연구 결과, 보성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해상의병의 거점이자 전라좌의병의 구심점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777명의 보성의병을 나열한 나무 명패. 

■ 남도 의병의 중심, 보성의병 777명 발굴
남도 의병의 중심, 의향 보성은 대한민국 의병사의 축소판과 같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부터 조국이 광복한 1945년까지 350여 년간 위험에 빠진 나라를 지키고, 이웃을 보호하려는 의병들이 분연히 일어났으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이 발굴됐다. 남도 의병의 중심, 보성에서는 777명의 의병이 의(義)로써 일어났으며,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성군은 노동면 누운재길 111(광곡리 354-1)에 ‘보성의병기념관’을 건립하고 보성 출신 의병들을 기리고 있는 이유다. 1층은 의병관, 2층은 죽천 박광전기념관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쓴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장계’를 써서 올린 곳이 바로 보성의 ‘열선루’다.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선조의 명에 항명하고, 명량해전에서의 대승해 나라를 지켜낸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장소가 보성에 있다. 보성읍 옛 공공도서관 옆에 있는 열선루는 육군으로 편입해 싸우라 명한 선조의 교지에 ‘장계’를 올린 뒤 조성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얻고 보성 의병을 모집해 회천에서 명량해전으로 나갔다.

보성 열선루는 조선 수군 재건의 현장이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하다. 이순신 장군은 열선루에서 장계를 올린 뒤 조성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얻고, 보성 의병을 모집해 회천에서 명량해전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보성 출신 선거이 장군, 최대성 장군, 전방삭 장군은 임진왜란 전반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의 스승이자, 퇴계 이황의 제자 죽천 박광전은 노령한 나이에 의병 700여 명을 거병해 전국 최초로 전라좌의병을 창의했다. 임계영 장군은 의병장이 돼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으며,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보성에서 창의한 전라좌의병은 전남지역뿐만 아니라 진주성 전투 등 전국구로 의병 활동을 펼쳤다는 기록은 보성 의병이 지역방위를 넘어 전국적인 의병 활동에 적극 나섰다는 증거다.

병자호란에는 보성에서 우산 안방준 의병장이 ‘호남병자창의소’를 세워 창의했으며, 한말에는 머슴 출신의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을 배출하기도 했다. 호남에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진 곳 또한 보성이며, 보성은 호남지역 만세운동에 불을 댕겼다. 보성은 6·25한국전쟁 전후로 민족상잔의 아픔을 담은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로 아픈 역사를 문학적으로 승화하는 등 의병의 역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포괄하는 문화 자원까지 겸비하고 있는 곳이다.
 

보성의병기념관 내부.

■‘보성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마라’ 회자돼
죽천 박광전은 칠순 노령으로 의병을 일으킨 유학자다. 중종 21년(1526) 조성면 용전리에서 태어났으며, 이퇴계의 문인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던 대 유학자로서 광해군의 사부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우고 문인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전라좌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전란극복을 위해 백성들을 위무하고 유민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우국충정을 몸소 실천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칠순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벽전투에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노병으로 인해 군영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도 평소 그의 학덕과 충의를 흠모했던 지방 유림들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숙종 33년(1707)에 용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죽천 박광전은 지금도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창의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각각 67세와 72세 때로 조선 시대 평균수명이 30세였음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100세도 넘는 나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창의 격문에는 불참할 시 연좌제로 가족까지 벌하겠다는 내용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는데, 박광전은 왕에 대한 충성이나 불참자에 대한 복수보다 가족과 이웃, 민족을 구하기 위해 창의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근대적 민권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보성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사실 이 말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 치열하고 끈질기게 저항한 보성 사람들의 용기와 패기에서 붙여진 말이라고 한다. 아시다시피 ‘담살이 안규홍 의병장이 주먹으로 일본군을 때려눕힌 사건에서 연유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벌교에 가면 안규홍 의병장을 기리는 기념물이 조성돼 있다. 의병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자발적으로 일으킨 저항조직으로, 의병들의 희생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보성의병기념관 내부.

한말 의병 활동에 나선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은 전국 유일의 머슴 출신 의병장이다. 안규홍은 전투기술과 신출귀몰한 위장술로 인해 일본군이 신원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안규홍을 ‘거괴’로 분류, 일본군 중 가장 악랄한 육군 정규군 14연대를 파견해 안규홍 부대를 말살하려고 하기도 했다. 안규홍 부대의 특이점은 일제 강점기에도 팽배했던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양반 유생들이 머슴 의병장의 휘하에서 뜻을 함께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는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어 구국정신으로 민족이 하나로 융합되는 항일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임계영(1528∼1597) 전라좌도 의병장을 비롯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든 의병들의 삶을 책으로 묶었다. 머슴살이 의병장 안규홍,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독립운동 선각자 송재 서재필 등 임진왜란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혼돈의 역사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777명의 의병을 재조명했다. 지난 2018년에는 777명의 보성 의병을 발굴, ‘보성 의병사’ 전3권을 발간했다. 

한편 ‘보성의병기념관’에서 선물로 받은 충절의 보성 선비 박광전, 임계영 의병장의 충절의 이야기를 담은 정찬주 장편소설 ‘보성강의 노래’(2022, 여백출판사 펴냄)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가장 소중하고 큰 선물이다. 정찬주 소설가의 ‘의병 이야기’는 보성군과 나주시, 강진군, 화순군 등 전남 지방자치단체의 ‘의향(義鄕) 정체성 찾기’ 열정이 보여주는 지역의 인물과 역사의 행적을 추적하는 결실이 빛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충의(忠義)의 고장, 충절(忠節)의 고장’이라 내세우는 충청도 홍주(洪州) 사람들에게는 ‘천년 홍주(洪州)의 정체성(正體性)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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