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동학농민혁명, 갑오년 2월 6일 ‘덕산에서 첫 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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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동학농민혁명, 갑오년 2월 6일 ‘덕산에서 첫 기포’
  • 이보미 기자
  • 승인 2024.05.17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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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2〉
역리동학농민군 주둔지(삽교 역리 125-23).

홍주와 예산, 서산, 태안, 당진지역은 내포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
농민들 보국안민·제폭구민·척왜척양의 기치 내걸고 혁명운동 전개
홍주동학지도자 ‘덕산 기포’를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첫 기포’로
동학농민혁명, 전라도 고창·정읍 넘어 ‘양반의 고장’ 충청도 확산


충남지역 동학농민혁명사에서 홍주와 예산을 비롯해 서산, 태안, 당진지역은 내포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명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관군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로 인해 조선에는 청군과 일본군이 같이 주둔하게 됐다.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충청 서부지역 최후의 보루라 여기고 있던 홍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홍주를 중심지로 한 예산, 서산, 태안,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인 홍주성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참패함으로써 결국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나게 됐다.

당시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조선 주둔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패전으로 끝났다. 이로써 청나라의 조선 지배는 끝났지만, 청나라에 승전한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그리고 10년 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조선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에는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일본의 강점을 초래했다고 해서 동학농민혁명운동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일이다.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주체인 농민들은 보국안민(報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조선의 정치 외교를 좌지우지할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해 혁명운동을 성공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운동은 부패한 지배층에 항거한 반봉건농민운동이고, 신분철폐와 사회개혁을 앞세운 근대화 운동이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맞선 항일운동에 그 의의가 있다하겠다.


■ 덕산 봉기를 시작으로 농민군 규합
그중에서도 예산지역은 동학농민혁명군 6만여 북접군의 활동 중심지였다. 당시 농민군을 지휘했던 덕의대접주 춘암 박인호(1855~1940)는 내포지역에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기치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교화, 동학교단을 조직했다. 박인호는 충청 서부지역의 북접을 이끌면서 지방관과 대지주의 수탈과 착취가 극심했던 1880년대 내포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했다. 내포지역 동학혁명사의 한가운데에 천도교 4대 교주 박인호가 자리하는 이유다. 

박인호는 29세 때 예산 오리장터 주막에서 동학에 관한 소문을 듣고 동학이 시대 민중을 이끌 진정한 교리임을 깨닫고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한다. 1882년 광화문복합 상소 소수(疏首) 자리에 사촌 동생 박광호를 내세우고, 이듬해에는 보은 장내리 집회에서는 덕의(德義) 대접주가 돼 내포동학의 조직 기틀을 마련한다. 

박인호는 덕산 하포리를 중심으로 육임제의 접조직 방식으로 포덕에 힘써 덕포(德包)라는 전국에서 가장 큰 동학 조직을 갖추게 됐다. 내포지역은 물론 경기지역인 진위 죽산, 연천까지 영역을 넓혔다. 9월 말 박인호는 덕산포 동학군을 데리고 아산 포구를 떠나 태안 방갈리 가시내에 상륙해 ‘태안옥’에 갇힌 동학도인 30여 명을 구출하는 한편 내포지역 동학군 6만여 명을 이끌고 여미평 전투와 관작리 전투, 홍주성 전투를 차례로 치른다. 특히 유림세력이 강성했던 지역 특성상 지방관과 지역 유력자가 결탁, 농민들을 억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접주들은 갑오년 2월 6일, 덕산 봉기를 시작으로 농민군을 규합했다. 

덕산군수와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덕산에 살던 이정규는 ‘합덕지’를 개간하고 수세를 부과하면서 인근 지역 농민들을 악랄하게 수탈했다. 이정규의 가혹한 수탈과 탐학에 분노한 농민들은 나성뢰를 장두로 추대하고 수천 명이 모여 이정규의 집을 불태운 것으로 알려진다. 나성뢰가 같은 해 8월에 홍주의 주요 동학지도자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1894년 2월 6일의 ‘덕산 기포’를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첫 기포’로 볼 수 있다.
 

예포대도소 터(삽교 성리 410-7 일대).

■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활동 활발해
박인호의 9월 기포령을 시작으로, 인근 각지에서 들불처럼 농민군이 일어나 서산, 태안, 대흥 등 인근 관아를 점령했다. 혁명의 불꽃이 전라도 고창과 정읍지역을 넘어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던 충청도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하지만 인근 아산만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나서면서, 농민군의 수난은 시작됐다.

특히 홍주목(洪州牧)은 내포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충청 서북부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은 7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7월 말이 되어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선무사(조선시대 국왕이 재해나 병란이 일어난 지역에 임시로 파견한 관리) 정경원은 박인호, 박희인 등 주요 동학지도자를 불러 효유하려고 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8월에는 박인호가 덕산에, 박덕칠이 목시에 도소를 설치하고 활동에 들어갔으나 관아를 습격하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 악질 양반과 토호들을 응징하는데 주력했으며, 일반 민중들은 동학에 물밀 듯이 들어와 동학의 세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 눈치만 보던 대부분의 양반들은 7월 하순부터 동학에 협조하지 않고 피난길에 나서기 시작했다.

충청도 내포(內浦)지역의 예포(禮包;예산지방의 포)와 덕포(德包;덕산지방의 포) 소속 북접 동학교도들은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홍주, 서산, 태안, 당진 등지에서 동학도소(東學道所)를 설치하고 기세를 떨치자 이 지역의 수 많은 민중들도 자진해 다 함께 동학에 입도, 합류했다. 이처럼 2월의 첫 번째 ‘덕산 기포’와 4월 초에 전개된 두 번째 ‘홍주 원벌 기포’는 내포지역의 동학조직을 더욱 결속시켰다. 

특히 서산 원벌에는 동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순식간에 벌판을 덮다시피 몇만 명이 됐다고 한다. 마침 서울 양반의 후예인 이진사가 서산에 살았는데, 어떻게도 동학농민군을 음해해 재물을 탈취했는지 이자를 벌하기 위해 제1차로 통문을 돌려 홍주 원벌에서 대회를 열게되면서 이 소문을 듣고 순식간에 몇만 명이 벌판을 덮자 이진사는 그만 혼비백산해 백기를 들고 나와 사죄를 하고 죽기를 청해, ‘항자불사’라고 그를 효유해 놓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내포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충청 서부지역을 동학도에게 장악당하자 정부와 일본군은 동학 토벌작전을 미룰 수가 없었다. 군대를 파견해 10월 10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들어갔다. 충청 서부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홍주성을 거점으로 각 군·현의 병력을 집결시키는 한편 유회군을 조직하고 일본군을 출동시켰다. 제일 먼저 예포의 거점인 목시에 있는 도소를 습격했다. 목시는 예산 삽교읍에서 북쪽에 있는 작은 들판 마을이다. 

10월 11일에 일본군 300명이 공격해 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이 공격에는 홍주 수성군과 유회군이 출동한 것으로 보인다. 대접주 박희인은 목시에서 패한 것은 수성군에 비해 동학군은 전혀 전투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된 박희인 대접주는 각지 접주들에게 우수한 포수를 물색하게 했고 10월 15일(양 11월 12일)에 이르자 30여 명의 포수가 모이자 이들과 같이 4명의 두령급 접주를 대동하고 태안으로 갔다.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추격해, 25일에는 예산 신례원(新禮院)으로 진출했다. 홍주유회군 1000여 명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26일 새벽에 출동, 아침나절에 기습해 왔다. 동학농민군은 즉각 이들을 포위하고 섬멸해 또다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예산과 덕산으로 진출해 이 지역을 점령했다. 

수탈과 탐학의 부패정치를 혁파하고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내포지역 3만여 동학농민군은 한양으로의 진격을 위해 집결했던 예산 관작리에서 관군과 유회군으로 편성된 관군을 물리치고 1894년 10월 27일 삽교 송산리, 역리 일대에 주둔했다.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의 자주, 평등, 자유의 숨결이 서려 있는 이곳은 당시 홍주성 공격에 나선 동학농민군이 예산에서 홍주로 향하던 중 하루를 유숙하며 사용한 우물이 예산군 삽교읍 송산리 92번지에 현존하고 있으며, 역리마을과 함께 내포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유적지이다. 

내포동학농민군은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의 탄신일인 28일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고, 다음 날 홍주성(洪州城)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무수한 희생자를 남기고 불행하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홍주성 공격에 나선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우물(삽교 송산리 92).
동학농민군이 홍주성 진격을 위해 예산에서 홍주로 향하다 유숙했던 삽교 역리마을 일대.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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