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산면에 충의사, 기념관, 저한당(성장가), 광현당(생가), 부흥원이 있다
1930년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는 글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행사, 홍구공원에서 폭탄 던져
언론 “이 땅의 젊은이들이여, 윤봉길 의사의 뜻을 잊지 말라” 대서특필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1908~1932)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의사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 시설로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는 충의사(영정을 모신 곳), 기념관(유물 전시), 저한당(성장가), 광현당(생가), 부흥원(농촌부흥운동) 등이 있다.
예산군 덕산면의 충의사는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에 위치하고 있다. 충의사는 면적이 4만 5000평이 넘는 넓은 부지에 조성됐으며,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다. 충의사는 크게 4개 구역으로 구분된다. ‘본전지역’은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과 어록탑이 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유품(보물 제568호) 27종, 51점이 전시돼 있으며, 윤봉길 의사의 짧은 일대기를 매직 비전 11대와 각종 영상, 디오라마로 보여주고 있다.
■ 매헌의 삶 ‘민족교육·청년계몽·독립운동’ 서사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11살이 되던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일본인 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했다. 1921년, 14세부터 19세까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이때 스승 성주록은 윤봉길에게 “나로서는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라며, 석별 기념으로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해 ‘매헌’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오치서숙을 나온 후에도 홍성의 유교부식회에 가입해 홍주의병의 항일정신을 배웠고, 자신의 집 사랑방에 학생들을 모아 야학을 개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는 등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시행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한 ‘야학’이나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한 탄압을 보며, 결국 ‘농촌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낀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윤봉길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청소년기였다. 농촌 소년이던 윤봉길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몸소 느끼면서,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게 됐다. 이 시기 윤봉길은 ‘부흥원’이라는 단체를 세워 교육 운동을 펼쳤고, 젊은이들과 함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활동에 몰두했다. 20대에 접어들며 윤봉길은 ‘월진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청년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단순한 무장투쟁이 아니라 교육과 계몽, 민족의식 고양을 통해 민중을 깨우치는 것이 독립의 시작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윤봉길의 말과 글에는 언제나 희생과 나라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1929년, 윤봉길은 일본에 건너가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조선인 청년들과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 사회의 차별과 억압을 직접 경험하며 독립에 대한 의지가 더욱 굳건해졌다. 귀국 후에는 한동안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다, 마침내 중국 상하이로 떠날 결심을 한다.
윤봉길은 무작정 싸우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고민했다. 윤봉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중국 상하이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그곳에서 윤봉길은 김구 선생을 만나고, 무장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게 된다. 단순히 나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생명을 내던질 준비가 된 인물이었다.
윤봉길이 상하이로 가기 전 쓴 유서에는 “백범 선생님, 이 나라를 위해 제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 짧은 한 문장 속에 조국과 민족을 향한 결의와 사랑이 깊이 느껴진다. 당시 윤봉길은 겨우 24세였다.
윤봉길의 성장기는 조국을 위해 준비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윤봉길의 삶은 민족교육, 청년계몽,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진 독립운동의 서사였다.
■ 일본 땅에서의 죽음, 서울 효창공원에 잠들다
1932년 4월 29일은 일본 천황의 생일이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열렸다. 일본군 주요 인사들과 상하이에 거주하던 일본인, 중국 고관까지 참여한 이 자리는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윤봉길은 폭탄을 던지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윤봉길은 사건 당일 새벽, 단정한 조선 청년의 모습으로 행사장 인근에 도착했다. 도시락과 물통 안에 각각 시한폭탄과 수류탄을 숨겨 놓고, 천천히 사람들 속으로 섞였다. 오전 11시 무렵,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중국 고관 등이 함께 단상에 올랐을 때, 윤봉길은 도시락형 폭탄을 던졌다. 폭발과 동시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시라카와 대장을 포함해 여러 고위 인사가 중경상을 입었다. 일부는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었다. 윤봉길의 행위는 명백한 정치적 선언이었고, 조선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는 독립전쟁의 신호탄이었다. 의거 직후 윤봉길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됐다. 윤봉길은 도망가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히 “나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행동한 조선인이다”라고 밝혔다. 일본 측은 곧장 그를 군사재판에 넘기고,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형무소에서 총살형에 처했다. 당시 윤봉길의 나이는 25세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김구 선생은 이 사건 이후 “윤봉길 한 사람이 일으킨 의거가 수십만 청년을 깨웠다”고 기록했다. 그만큼 윤봉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단순한 개인의 희생을 넘어서 독립운동 전체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는 당시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조선을 모르던 외국인들에게도 ‘독립국가 조선’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심어줬다. 이는 외교적, 심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았다.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낸 조선인의 의지는 이후 더 큰 연대를 이끌어 냈다.
중국 정부도 윤봉길 의사의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장제스 총통은 “이처럼 의로운 젊은이는 중국에도 드물다”고 극찬했고,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측의 지원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한중 연대의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윤봉길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직후, 일본은 그의 유해를 가족은 물론 임시정부에도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처리했다. 공식적으로는 ‘불명’이라 불릴 만큼, 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수십 년이 흐른 뒤, 한국과 일본의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윤봉길 의사의 유해 위치를 밝히기 위한 작업이 꾸준히 이뤄졌다. 특히 1945년 해방 이후부터는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찾으려는 노력이 본격화됐다. 이에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 관련자들이 일본 각지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1958년,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일본 가나자와의 마쓰오카 공동묘지 근처에 매장돼 있다는 정보가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그 정보는 당시 일본 시민단체와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의해 수집됐고, 정부는 마침내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게 됐다.
1959년 7월 18일,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드디어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당시 서울역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애국자 윤봉길’을 맞이했다. 열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묵념을 했고, 유해는 마치 국가 원수처럼 예를 갖춰 운구됐다.
그렇게 윤봉길의 유해는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이곳에는 김구, 안중근, 이봉창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해마다 4월 29일이 되면 홍구공원 의거를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이처럼 유해 귀국은 단순한 장례 절차가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의 기억을 되찾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생전에 조국을 떠나 전사했지만, 죽어서라도 고국 땅을 밟는 것이 그와 국민 모두에게 의미 있는 귀환이었다. 나라를 위한 희생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여, 윤봉길 의사의 뜻을 잊지 말라”고 대서특필했다.
스물다섯에 생을 마친 윤봉길은 거사 며칠 전 사랑하는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