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외암마을과 중리마을 맹씨행단의 돌담과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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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외암마을과 중리마을 맹씨행단의 돌담과 돌담길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5.08.07 07:13
  • 호수 903호 (2025년 08월 07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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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문화유산 재발견, 옛담의 미학-돌담이 아름다운 마을〈7〉

충남 아산의 외암민속마을(송악면 외암민속길 34)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돼 있다. 마을은 500여 년 전부터 형성됐는데 충청 지역 양반가의 한옥과 서민층의 초가집 등 전통가옥이 잘 보존돼 있어 조선 후기 중부지방 향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택과 초가, 5.3km의 돌담과 돌담길은 우리의 옛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마을 전체가 민속박물관이다. 

아산의 외암마을은 설화산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자리한 배산임수, 동고서저의 지형으로 길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실개천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 너른 논배미가 펼쳐지고 초가집들이 아담하게 골목골목 줄지어 늘어서 있다. 

외암마을은 500여 년 전에는 평택진씨, 강씨와 육씨가 살고 있던 혼성(混姓)마을이었다고 전해진다. 창신교위 이사종은 진한평의 맏사위(세딸 중 맏이)가 되면서 처가 재산을 물려받고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예안이씨 온양파가 됐고, 예안이씨 집성마을이 됐다고 한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郎)을 지낸 이연(이사종의 부친)의 묘를 이곳에 썼는데, 이후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가 배출되자 마을이 반촌(班村)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외암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연의 6세손인 이간(李柬)이 호를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의 호에서 연유됐다는 설과 조선 초기부터 이미 시흥역이 있어 이 역의 말을 거둬 먹이던 곳이라서, ‘오양골’이라 부르다 ‘외암’이 됐다는 설도 있다.
 

아산 외암마을 돌담길.

■ 국가민속문화재 외암마을 5.3㎞ 돌담길 
마을 앞 개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낮은 구릉지에 옹기종기 들어선 충청도 반가의 고택과 초가들이 맞는다. 마을 안으로 진입하면 집집이 돌담이 정겹게 쌓여 있다. 줄지어 선 돌담의 길이를 합치면 모두 5.3㎞에 이른다고 한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외암마을에는 모두 56채의 옛집이 있다고 한다. 기와집과 초가가 돌담길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설화산이 품 안으로 마을을 감싸고 반계라는 이름의 작은 냇가가 주변을 흐르고 있다. 고택들과 돌담은 마을 어귀에서 꽤 넓은 안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자리 잡고 마을 전체를 잇고 있는 형국이다.

외암마을의 마을길은 돌담길이 집과 집들을 잇고 있다. 돌이 많고 말(글 읽는 소리)이 많고 양반이 많은 마을이라 ‘삼다마을’이라 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은 돌이 천지다. 논밭을 일구며 캐낸 돌로 수백 년 세월 담을 쌓고 또 쌓았으면서 매만졌다. 마을 사람들의 정성 담긴 심성을 닮았는지 세월이 쌓인 건지 돌담은 두툼하면서도 세월의 더게와 빛을 더했다. 그 두툼하고 세월의 이끼가 감싼 돌담은 기와집, 초가집, 큰집, 작은 집 가리지 않고 쉬엄쉬엄 이웃을 이으면서 마을의 담이 됐고, 이 돌담을 따라 자연스레 돌담길이 형성됐다. 자연스럽게 생활의 지혜와 삶의 세월이 어우러진 돌담이다. 그 돌담의 줄기줄기 마다에는 어김없이 옛집이 한 채씩 달려 있으며, 고택에는 갖가지 이름이 붙어 있는데 옛 주인의 관직명과 출신지를 땄다고 한다. 참판을 지내 외암마을에서 가장 큰 참판댁, 성균관 교수를 지낸 교수댁, 감찰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등 택호가 다채롭다. 마을 어귀 신창댁을 시작으로 마을 동쪽 끝에 외암종손댁과 사당이 달렸고, 그 밑에 송화댁, 참봉댁 등이 줄줄이 열렸다. 마을 한복판에 마을의 중심, 건재고택이 움텄고 옆으로 감찰댁, 위로 교수댁이 벌었다. 마을의 기둥, 참판댁은 동쪽 양지바른 터에 싹을 틔웠다. 모두 입향조, 이사종의 후손 집들이라고 한다.  

돌담이 이웃과 세대를 잇는 핏줄이라면 물길은 사람에게 이로운 생명줄이다. 외암마을은 물길을 내어 설화산 계류를 마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물길은 빨래터가 되고 설화산의 화기를 누르는 방화수를 제공했다. 풍류를 즐기는 집주인에게는 정원의 소재로 이용됐다. 송화댁, 건재고택, 교수댁 집주인은 이 물길을 이용해 전국에서 소문난 정원을 꾸몄다. 옛날에 엿장수가 이 마을에 엿을 팔러 왔다가 돌담이 길어 길을 잃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 마을에 들어서면 길고 긴 돌담이 이끄는 대로 걷게 된다. 돌담 너머 보이는 담쟁이덩굴과 호박, 감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밤나무 등의 덕에 이 마을이 참으로 더 풍요로워 보이는 이유다.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의 돌담.

■ 사적 제109호 맹씨행단, 중리마을 돌담
아산 송악면의 외암마을이 설화산을 주산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배방읍의 중리마을 300번지 일원에 자리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맹씨행단(배방읍 행단길 25) 마을은 설화산 뒤쪽으로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중리마을은 설화산 주봉이 북동 방향으로 이어져 내려오다 양지바른 들판을 감싸 안은 지형이다. 중리마을에는 몇 채의 한옥들이 남아있고 신창맹씨들이 중심이 돼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이곳 중리 큰마을에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살림집인 맹사성고택이 있다. 고택의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으로 네모뿔대의 초석(礎石)을 놓아 네모기둥(方柱)을 세웠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고려와 조선 시대 사람으로서 우왕 때 과거에서 장원하고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돼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고, 청백리로 여러 일화를 남겼다. 자는 자명이며, 호는 고불, 본관은 신창으로 온양 출신이다. 
 

아산 배방읍 맹씨행단 돌담.

마을 중턱에 자리한 이곳은 맞은편에 고불맹사성기념관과 동상이 있는 공원이 조성돼 있으며, 고택에는 이중, 삼중으로 돌담이 둘러져 있다. 들어가는 돌계단부터도 돌과 돌담으로 쌓아 특이하다. 넓은 뜨락 입구 쪽으로 맹사성이 심었다는 600여 년 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이 고택은 우리나라 민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고려말 최영 장군의 아버지가 지어 최영 장군이 머물렀던 집을 손녀사위인 맹사성에게 물려준 집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고택을 중심으로 이 마을에도 돌담이 길게 펼쳐져 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남긴 홍주(洪州)출신의 최영 장군은 아버지 최원직이 최영이 16세 때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맹씨행단은 돌과 인연이 있는 곳일까. 그래서 ‘고불맹사성기념관’을 건립하면서도 돌을 이용해 돌담을 쌓았을까. 맹씨행단의 돌담은 자연석으로, 크고 작은 자연석 강돌을 사용해 여백에 채우는  맞물림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자연석만으로 쌓은 돌담이 가옥을 두르고, 담장 주변의 경사진 후원에는 다양한 꽃들과 느티나무, 전나무, 감나무 등이 우거져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와 고목이 고택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고조시킨 특징이 있다.

중리마을의 다른 가옥들도 돌로 담장을 둘렀거나 논밭의 축대를 쌓기도 한 집들이 많다. 설화산 주변의 지질조건 상 마을이 형성된 지표면에 수많은 괴석(塊石)이 형성돼 있는 지질이라고 한다. 그래서 담장을 쌓는데 사용된 돌은 마을 현지에서 채취하거나 또한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걷어낸 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망을 흐르는 개천의 양 측면에도 돌로 축대를 쌓았고, 그 위에 돌담을 쌓기도 했다. 일부 가옥의 경우 예전에 쌓은 돌담이 훼손된 곳도 보여 복원이 필요해 보이는 곳도 여기저기에 있다. 오암마을과 함께 중리마을도 돌담을 잘 정비한다면 ‘맹씨행단’이나 고택을 찾는 사람들과 ‘고불맹사성기념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좋은 문화재로의 가치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지역의 돌담은 자연과 조화된 곡선미, 자연석을 활용해 허튼층쌓기 기법 등이 어우러진 한국 전통 건축 문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돌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일정한 규칙 없이 쌓는 방식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견고한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돌을 인위적으로 다듬기보다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해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느낌을 준다. 이 때문에 각 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그 자체로 자연미를 살리고 있다. 돌담은 단순한 경계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공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기와나 흙을 덧대어 마감함으로써 안정성과 방수 기능을 강화하면서 자연 친화적인 방법이 특징적이다.

외암마을 돌담길.
외암마을 돌담길.
외암마을 돌담길.
중리마을 돌담.
중리마을 돌담.
맹씨행단 돌담.
맹씨행단 돌담.
맹씨행단 돌담.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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