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청산리(靑山里)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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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청산리(靑山里)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묘
  •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 승인 2025.09.04 07:21
  • 호수 907호 (2025년 09월 04일)
  •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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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6〉
보령 청소면 재정리 백야 김좌진 장군 묘. 바로 뒤는 부친(김형규)의 묘.

1930년 1월 24일 만주에서 북로군정서에 있던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마흔한 살의 나이에 암살된 후 본래 만주의 흑룡강성 해림시(海林市) 산시진(山市鎭) 근처에 안장됐다가 부인인 오숙근 여사가 1934년 4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장군의 유해를 밀감 상자로 위장해 국내로 운구한 후 장군의 고향인 당시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70-4로 옮겨져 밀장됐다. 이후 1957년 김두한이 지금의 보령 청소면 재정리 산50번지로 이장했다.

1993년 4월 16일 갈산면장이던 전하수 면장이 서부 이호리에 세워져 있던 ‘백야거사안동김공좌진지묘(白冶居士安東金公佐鎭之墓)’의 묘비를 발견했다. 당시 서부면 이호리 주민들은 묘지의 위치를 고증하고 확인까지 했다. 현재 서부면 이호리 산70-4에는 매장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 상태로 야산의 공터로만 남아 있다.

1958년 주먹왕으로 알려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아들 김두한이 어머니 오숙근 여사가 78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홍성 서부에 있던 부친의 유골을 선산이 있는 보령으로 이장해 어머니와 합장한 묘소가 지금의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162-7번지의 묘소(충청남도기념물 제73호)다. 묘소 뒤에는 부친(김형규)의 묘소가 있다.

현재 묘역(일대 2만 5344㎡)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돼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 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馬)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김좌진 장군의 무덤 뒤에는 부인인 오숙근 여사의 묘가 있으며, 1989년 김좌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충청남도기념물 73호로 지정돼 보령시청이 관리하고 있다. 보령시에서는 매년 10월 22일 김좌진 장군의 호국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좌진 장군 묘소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보령 청소면 백야 김좌진 장군 묘역 전경.

■ 호명학교, 90여칸 집 교사(校舍)로 제공
김좌진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로,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며,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고, 홍성군 갈산면에서 명문 양반가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는데,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고, 모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첫째 아들인 김경진이 서울에 양자로 가면서 차남인 김좌진이 장남 역할을 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했고,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눠 줬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열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고 90여 칸 집을 교사(校舍)로 제공했다. 또한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고,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했다.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했고,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했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갔다가 변절한 친척의 뒤통수로 미리 잠입한 일본 경찰에 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으며,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으며, 대한광복회 부사령을 맡았다. 대한광복회의 와해 이후 북간도로 건너가,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됐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돼 독립군 편성에 주력했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소장이 돼 엄격한 훈련을 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했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켰다.
 

보령 청소면 백야 김좌진 장군 묘.

■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전투 
1920년 10월에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됐는데,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 고동하 전투를 끝으로 청산리 전투가 전개됐으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 휘하 부대가 서로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둬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전술 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둬 독립전투 사상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북진을 강행하며 그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해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했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 정부의 선전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좌진도 우수리강을 건넜다. 그러나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해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과 총사령관을 맡았다. 이때 북으로 간 군대들은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무척 큰 피해를 입어 천만다행이기도 했다. 한편 자유시 참변으로 반공 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은 참변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방앗간 등으로 동포들에게 인심을 얻으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에 만주의 독립운동에 지도자로 활약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했다.

1925년 신민부(초기엔 한족연합회)를 창설했는데,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했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됐는데,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항렬이 같은 아우뻘인 아나키스트 김종진 등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이자,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여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김좌진은 유언으로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장군의 돌연한 비보가 전해지자 당시 국내외 혁명동지들의 놀라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국인까지도 아연실색했는데, 특히 국내에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는 기자와 사원을 급파하고 정중한 조의와 거액의 부의금을 전달했다. 재만 혁명동지들은 중동선 산시역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장의(葬儀)를 치고 유해는 만주 땅에 묻혔다. 이후 동지들의 도움으로 유해는 비밀리에 부인 오숙근 여사에 의해 고국으로 운구(運柩)돼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梨湖里)에 안장됐다가 1957년 정월에 지금의 묘지인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이장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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