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1930~40년대 몰락해 가는 남원의 양반가 고난과 애환 생생
전주와 남원 배경으로 전라도 토속어 사용, 향토적 분위기 살린 생동감
종가를 지키는 종부·상민의 삶 속에 일어나는 암울한 시기 민족성 그려
인간의 삶과 예술적 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 소중한 문학적 자산
최명희(崔明姬,1947~1998)의 소설 ‘혼불’은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몰락해 가는 전라도 남원의 양반가 매안 이씨 문중과 그 속에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상민 거멍굴 사람들의 고난과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등 작가의 철저한 고증을 통해 아름다운 국어로 생생하게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특히 작가는 매안 이씨 문중의 종부로 결혼해 1년 만에 청상과부가 된 청암 부인, 청암 부인의 양자로 들인 시동생의 장자 이기채, 이씨 문중의 장손 강모, 청암 부인의 뒤를 이어 종부가 되는 허효원을 비롯해 강태, 춘복, 강실, 강호, 기채 등 등장인물을 통해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와 상민의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과 암울한 시기의 민족성을 그리고 있다.
‘혼불’이 우리 앞에 선을 보인 건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다. ‘혼불’ 2부는 1988년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기 시작해 1995년 10월까지 만 7년 2개월 동안 계속돼, 당시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때 육필로 쓴 원고지만 1만 2000장에 달했다고 한다. 또 1996년까지 전 10권이 완간되는데 쓴 원고지만 4만6000장에 이르고, 6000여 가지의 어휘를 사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주 최명희문학관· 남원 혼불문학관
이 소설을 쓴 최명희 작가는 삭녕 최씨로, 본적은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이며, 전주에서 1947년 10월 만추의 계절에 태어나 1998년 12월 51년 세월의 젊은 삶을 살고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명희는 소설 ‘혼불’에서 엄숙한 관혼상제의 의식에서부터 일상적 풍속이나 관습, 한국인의 세시 풍속, 음식, 노래 등에 이르기까지 그 유래와 이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인 생활의 모든 면모를 상세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또 작가의 고향인 전주와 남원을 배경으로 전라도 토속어를 사용, 향토적 분위기를 살리고 생동감을 주면서 한국 문화와 정신을 예술적 혼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주한옥마을 최명희길에 위치한 ‘최명희문학관’에는 작가가 쓴 친필 원고부터, 지인과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 생전 인터뷰에서 추린 말들이 담겨 있다. 문학관의 규모는 아담하고 작지만 최명희에 대해 알기에는 충분하고 다양한 자료들이 잘 보존돼 있다.
전주 한옥마을을 거닐다 보면 최명희의 생가터가 작은 비석으로 표시돼 있다. ‘작가 최명희는 바람이 서늘해져 가는 1947년 늦가을의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전주와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던 최명희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대하소설 ‘혼불’이라는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98년 써 내려갈 글감들을 뒤로하고 지병으로 향년 52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6년 12월에 전 5부 10권으로 출간됐다. 투병 중에도 제5부 이후를 구상하고 자료를 정리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집필하지 못하고 타계해 미완으로 남았다.
소설 ‘혼불’의 배경인 남원 사매면 서도리 닭벼슬봉 아래 지리산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 ‘혼불문학관’이 둥지를 틀고 있다. 혼불문학관이 들어선 노봉마을은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 속한다. 노봉(露峰)이란 이름은 마을 뒤에 우뚝 솟은 노적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1917년 발행된 지명 자료에는 노봉마을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노봉마을은 삭녕(朔寧) 최씨 세거지(世居地)로 알려져 있는데,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이끌었던 공으로 영의정에 두 차례나 올랐던 최항이 대표적 인물이다. 최항의 손자 최수웅이 이곳 마을에 은거하면서 대대로 명문을 형성했는데, 작가 최명희도 최항의 17대손이다.
노봉마을은 ‘혼불’에서 매안마을로 그려지는 실제 배경으로, 1999년부터 주민들이 직접 나서 ‘혼불마을’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추수를 끝내고 마을 주민들끼리 관광에 나섰는데, 노봉마을은커녕 남원도 잘 모르던 사람들이 ‘혼불’ 이야기를 하니 대번에 알아보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덕분에 주민들은 혼불문학관을 짓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대로 갈아오던 기름진 논밭을 헐값에 내놓았다. 마침내 지난 2004년 10월에 ‘혼불’의 배경이 됐던 노봉마을에 남원시에서 ‘혼불’과 작가 최명희의 문학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전승·보존하기 위해 지난 2004년 10월에 국고와 지방비 포함 49억 원을 들여서 ‘혼불문학관’을 개관했다.
■ 남원 사매면 노봉마을 ‘혼불’ 주 무대
소설 ‘혼불’은 일제강점기 전라도 남원을 배경으로 양반 가문의 몰락과 전통문화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강실이의 삶을 통해 가족사와 민족사가 얽히며, 전통과 변화 속 인간의 존엄성을 탐구한다. 종부인 청암(碃菴)부인과 손부 효원이 중심축을 이룬다. 두 축을 중심에 놓고 매안 이씨 양반가와 거멍굴 빈민들의 삶의 애환과 갈등을 씨줄로 삼고, 관혼상제나 음식, 의복 등의 세시풍속에 대한 설명과 묘사를 날줄로 해 장대한 대하소설을 엮어 내려간다.
‘혼불’의 주 무대였던 ‘매안마을’이 실제 남원 노적봉(568m) 북쪽 기슭에 들어앉은 노봉마을이다. 마을 들머리의 옛 서도역은 소설 혼불의 주 무대이면서 사매면 서도리 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효원이 매안으로 신행 때 내리던 곳이다. 강모가 전주로 통학하면서 내린 곳이기도 하다. 결국 효원과 강모가 드나들던 장소다.
지난 1932년에 개통해서 2001년 폐역(廢驛)이 됐지만, 2008년까지 76년을 이어오다가 2002년 전라선 이설로 옮겨가고 남은 역사는 1932년 개설 당시 모습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역사(驛舍)건물로 ‘전북 7대 비경’에 선정됐으며,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도 꼽힌다. 지금도 서도역과 혼불마을에는 평일은 물론 주말에는 젊은이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노봉마을을 둘러보면서 혼불문학관을 찾고 있다.
노봉마을에서 또 다른 볼거리로는 옛 스런 ‘흙돌담’을 만날 수 있다. 서도역에서 노봉마을로 이어지는 혼불마을의 혼불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전주의 최명희문학관을 꼭 찾아간다는 게 해설사의 설명이다.
‘혼불’은 매안 이씨 가문 삼대를 이루는 청암 부인과 그 아들 이기채 부부, 손자 이강모·허효원 부부와 거멍굴 천민 춘복이 등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런 연유로 종가(宗家)는 ‘혼불’의 중심 무대다. 청암부인, 율촌 댁, 효원과 강모가 거주한 곳이지만 지금은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실제로 지난 2007년 5월 서도리 노봉마을 삭령(朔寧) 최씨 폄재공파 종가에 불이나 당시 아흔셋이던 12대 박증순 종부가 연기에 질식해 숨지는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있는 안채는 불에 타 흔적만 남아 있다. 박 종부는 소설 속 주인공 ‘효원’의 모델이 됐던 인물이다.
박 종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종손인 강모와 결혼한 효원이며, 시어머니는 율촌댁, 시할머니는 청암부인의 모델이다. 최명희 작가는 외가인 노봉마을을 드나들다 박 종부의 얘기를 듣고 소설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 박 종부는 18세에 전남 보성에서 시집와 평생을 이곳에 살았으며,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6남매를 홀로 키웠다고 전해진다. 둘째 딸 최영희는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아들은 서울대병원 내과과장으로 일했던 최강원이라고 한다.
소설에 등장한 청호저수지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양반가를 지켜나가려는 맏며느리 청암부인은 이 청호저수지를 조성하면서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강구한다면 가히 백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누릴 만한 곳”이라고 했다.
전주에도 ‘최명희문학관’이 있지만 소설 ‘혼불’의 주 배경지가 남원 사매면 노봉마을이고, 작가의 문학적 세계와 ‘혼불 정신’이 현재 남원 혼불문학관에서 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은 남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혼불’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특히 1930~40년대 전북 남원의 한 전통 마을을 배경으로 격동의 시대 속에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정신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하는지를 방대한 서사를 통해 그리면서,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삶과 예술적인 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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