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태안의 땅과 바람 속에 숨 쉬는 민족의 뜨거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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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태안의 땅과 바람 속에 숨 쉬는 민족의 뜨거운 여정
  •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 승인 2025.10.16 07:04
  • 호수 912호 (2025년 10월 16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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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11〉
해미장터 3·1독립운동 만세시위지(해미읍성 앞 옛 시장터).

고요한 바다와 푸른 들녘으로 펼쳐진 서해안 태안반도의 작은 도시, 서산·태안에도 역사의 거친 물결 속에서 조국을 위해 떨쳐 일어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에는 태안군이 이미 서산군에 병합돼 태안군은 행정상 하나의 면(面)으로 격하돼 있었다. 따라서 서산군의 3·1독립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한다.

서산지역에서 독립운동 시위가 처음으로 전개된 곳은 해미다. 해미에서 상업을 하던 한병선(韓炳善)이 고종황제(高宗皇帝) 인산(因山)에 서울에 갔다가 독립운동 시위대열에서 ‘시위’를 하다가 독립선언서를 얻어 가지고 왔다. 한병선은 고심 끝에 평소 자별했던 기지리(機池里)의 이계성(李啓聖)을 찾아가 서울에서 목격한 이야기를 하니, 평소에 느꼈던 이상으로 이계성의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다. 이계성은 굳은 결심을 하고 한병선과 곧 실천에 옮기기로 다짐했다.

만약 거사 중에 일경에 잡혀도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은밀하게 동지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추진키로 했다. 이계성은 즉시 실천에 들어가 마침 3월 23일에 해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는 김연택(金然澤)·김관용(金寬容)·류세근(柳世根) 등과 밀약하고 졸업식을 마친 후 졸업생 전원과 재학생들을 인솔, 산정(山亭)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경에 발각돼 모두 경찰주재소(지서)로 연행됐다. 연행된 이계성은 모두 자신의 단독 계획임을 밝혔고, 밀약했던 김연택·김관용·류세근 등도 자신들의 계획이라며 다른 학생들은 모두 석방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이로써 결국 4명만 공주형무소에 투옥됐다. 하지만 주재소에서는 주모자가 ‘서울에 자주 내왕하는 한병선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한병선의 집을 감시하며, 이계성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면서 실토하면 ‘무죄 석방’이라며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계성은 끝까지 부인해 결국 이계성만 옥고를 치렀고, 한병선은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두 사람의 의리와 애국충정이 빛나는 순간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 해미, 첫 독립만세 시위, 천의장 최대 규모 
서산 해미에서의 독립운동 시위사건이 일어난 이후 정미·운산·서산·태안 등지에서도 연달아 독립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4월로 접어들면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낮에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주민들은 야밤을 이용해 횃불시위로 맞섰다. 4월 1일에는 태안 안면도 고남에서 이종헌, 이종근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를 했다. 특히 당시만 해도 서산군 관할 하에 있던 정미시장(貞美市場) 독립만세운동은 규모가 매우 컸으며, 또 격렬했다. 이인정(李寅正)·남주원(南柱元)·남상락(南相洛)·장기환(張基煥) 등이 핵심이 된 4일 천의(天宜)장날에는 주재소를 습격하고, 1000여 명이 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마침내 주모자 이인정과 남주원은 1년 6월, 남상락과 장기환은 각각 1년의 형기로 공주형무소에 투옥됐다. 또한 운산면 태봉리에 사는 이봉하(李鳳夏)가 중심이 돼 부락의 주민을 동원해 마을 뒤 태봉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는데, 주모자 이봉하는 공주형무소에 투옥됐으며, 연행된 일반인은 모두 석방됐다. 

이같이 표면적인 시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시위는 자제하고 은밀히 지하에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또는 군자금을 모금해 독립운동가를 돕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특히 해미 억대리 출신인 서병철(徐丙轍)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서산지부 조직을 위해 동지 규합에 몰두하던 중, 유태길(劉泰吉) 여사의 도움으로 서산 장리에 사는 김병년 승지를 만나게 됐다. 김 승지를 만난 서병철은 김 승지로부터 지부 조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고 즉시 안면도로 들어가 조선독립단 서산지부 초대 지부장으로 전종린(全鍾麟)을 추대하고, 오몽근(吳夢根)·이종헌(李鍾憲)·가재창(賈在昌)·임종석(林鍾錫) 등의 동지를 물색해 안면도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조직을 강화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이 지하 조직체를 중심으로 활동을 펴며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지령에 따라 군자금 모금을 하던 중 어느 부호자(富豪者)의 밀고로 일당이 모두 잡혔는데, 서병철은 4년, 다른 사람들은 2년 형의 옥고(獄苦)를 치렀다. 특기할 사항은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옥파 이종일(李鍾一)은 태안 출신으로 15세에 상경, 서울을 무대로 활동한 애국지사다. 이종일은 3·1독립운동의 거사계획과 독립선언서의 인쇄 책임, 독립선언서를 태화관에서 직접 낭독했던 장본인이다. 고향인 태안에서 독립운동 시위대열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에서 3·1독립운동 계획을 세우고 민족대표로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고결한 애국지사다.

■ 서산·태안 독립운동가, 이름보다 민족정신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서 태어난 옥파 이종일 지사(1858~1925)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낭독했다. 15세 때 문과에 급제한 이종일은 25세 때 박영효 수신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방문하면서 실학과 개화사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이종일은 ‘제국신문’ 창간과 흥화학교 설립 등 언론 및 교육 계몽운동을 통해 대중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또한 3·1 독립만세운동으로 2년 넘게 옥고를 치른 뒤에도 자주독립선언문을 직접 작성,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비록 계획은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며 평생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을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옥파 이종일선생 생가’는 이 지사가 태어난 곳으로 업적을 기리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성역화돼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매년 8월 31일, 서거일에 추모 제향이 거행돼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있다. 

서산·태안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름보다 민족정신이 살아 앞섰던 분들의 흔적이, 여전히 2007년 12월 7일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기름유출사고로 전국에서 130만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기름 제거작업을 도왔으며, 성금을 모금하기도 하면서 아픔과 고통을 극복해 냈다. 사고 초기 원상회복에 최소 10년 이상, 최장 10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됐으나 민·관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노력의 결과, 사고 발생 2년 만인 2009년 12월에 태안국립공원의 해양 수질과 어종이 기름유출사고 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회복됐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독립운동 여정은 나라가 처한 위기와 민족의 미래를 향한 뜨거운 책임감이 용암처럼 솟아나는 영광스러운 투쟁의 역사이자 동시에 고난과 희생의 연속이었듯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의 아픔을 이기고 유유히 흐르는 갯벌과 잔잔한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 서산·태안의 땅과 바람 속에 숨 쉬고 있다.

올해 광복 80년을 맞아 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문양목 지사 등 미국과 브라질, 캐나다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 6명의 유해가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문양목 지사의 유해는 본래 미국 멘티카 파크뷰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었으나 많은 단체와 기관들의 노력으로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8월 고국을 떠난 지 120년 만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와 안장됐다. 문양목(1869~1940) 지사는 충남 태안 출신으로 25세가 되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잡혀있는 동료들을 구하는 작전에 참여하는 등 많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1903년 인천에서 서당 교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국권회복 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콜로라도,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한인국민회의 전신이었던 대동보국회를 설립했고, 장인환, 전명운 의사 재판후원회를 결성해 지원에 앞장섰으며,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1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돼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키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했다. 1912년 신한민보 주필로 선임돼 책자 발간 등을 통해 항일 무장투쟁에 필요한 민족의식 선도에 앞장섰다. 대한인국민회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0년 안타깝게도 독립의 순간을 직접 보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파크뷰 묘지에 안장돼 있었다. 문양목 지사는 조국을 떠난 지 120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태안 몽산포에 위치한 문양목 지사의 생가터는 태안군 남면 몽산리 268-2에 집이 소실된 채 터만 남아 있다가 지난 2009년 12월 21일에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403호로 지정됐으며, 2014년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사당이 조성돼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렇듯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이름 없는 민초들, 나라를 잃은 슬픔보다 되찾을 희망을 먼저 외쳤던 독립운동가들의 뜨거운 함성과 눈물 어린 발자국은, 오늘의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땅의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태안의 옥파 이종일 동상.
서령학교 터.
서산공립보통학교 터(현 서산초).
신간회서산지회 창립지. 서산 천도교종리원.
옛 서령학교 터(현 서산시청 수도과).
옥파 이종일 기념관.
태안 옥파 이종일 생가.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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