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충화면 복금2리·양화면 원당2리마을 ‘인구 2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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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충화면 복금2리·양화면 원당2리마을 ‘인구 23명’
  • 취재·사진=한기원·김경미 기자
  • 승인 2025.10.30 07:13
  • 호수 914호 (2025년 10월 30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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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 인구감소시대, 충청의 마을공동체 소멸위기 현장을 가다〈17〉
부여 양화면 원당2리 마을전경. 2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부여 충화면 인구 6월 말 1056명, 가장 적은 복금2리마을 23명
양화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 원당2리마을로 15세대 23명
“젊은이와 애들이 있어야지” 충화면엔 학교 없고 양화초는 통합
과거 부여군 55개 초·중학교 있었지만, 그동안 32개교가 사라져


부여군은 백제 때 부여·임천(林川)·홍산(鴻山)·석성(石城) 등 네 고을을 합쳐서 이뤄진 군이다. 백제 때 부여 일원은 사비군(泗沘郡) 이었고, 임천 일원은 가림군(加林郡)이었으며, 홍산 일원은 대산군(大山郡), 석성 일원은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소부리(所夫里:일명 사비)라 불렀으며, 538년(백제 성왕 16) 웅진(熊津:현재의 공주)에서 이곳 부여로 천도해 남부여(南夫餘)라 했다. 751년(신라 경덕왕 10) 부여현으로 개칭됐다.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와 병합됐다가 1413년(태종 13) 독립해 부여현이 됐고, 1914년 홍산현·임천군 전역과 석성현·공주군 일부를 편입해서 부여군이 됐다. 1960년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돼 1읍 15면으로 구성돼 있다.

■ 충화면서 가장 적은 ‘복금2리마을 주민 23명’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팔충면(八忠面)’의 ‘충(忠)’자와 ‘가화면(可化面)’의 ‘화(化)’자를 따서 ‘충화면(忠化面)’이 됐다. 팔충면은 백제 시대 성충·계백 등 8명의 충신들이 출생한 곳이라 해 붙여진 지명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가림군(加林郡)과 대산현(大山縣)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시대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시대는 가림현(嘉林縣) 지역에 속했다. 조선 시대에는 임천군 팔충면 지역으로 지석(支石)·당동(堂洞) 등 5개 리를 관할 했다. 1895년 충화면 남쪽 가화면의 8개 동리를 합치고, 팔가면(八可面)으로 개칭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시 팔가면과 북박면, 홍산면, 한산군 하북면 등 4개 지역의 일부를 병합해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으로 개설됐다. 

서북쪽에는 마가산, 서쪽에는 노고산과 천등산, 남쪽에는 태봉산·석천봉·월명산·오산·시루산, 서남쪽에는 무제산이 있으며, 대부분 해발고도 200m 내외의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칠산천이 서북쪽의 지석리 마가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복금저수지를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덕용저수지(가화저수지)가 있다. 

충화면은 부여군 남서부에 있는 면으로 9개 법정리(지석·천당·팔충·복금·만지·현미·가화·청남· 오덕리)와 22개 행정리로 구성돼 있다. 소재지는 충화면행정복지센터가 있는 천당리다. 동쪽으로 부여군 임천면, 서쪽으로 서천군 마산면, 남쪽으로 부여군 양화면, 북쪽으로 부여군 옥산면·남면·장암면과 접해 있다. 대부분 구릉 지대인 충화면은 부여군 최고의 양잠 재배지이며, 약초, 잎담배 재배와 함께 축산업 또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주요 기관은 충화면행정복지센터, 충화치안센터, 충화우체국, 충화초등학교가 천당리에 자리 잡고 있다. 문화관광 시설로는 부여서동요역사관광지의 서동요 세트장, 서동요 둘레 길이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선조대왕태실비(宣祖大王胎室碑, 충청남도문화유산자료)가 오덕리 태봉산에 있으며, 지석리에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5기가 남아 있는 부여 지석리 고인돌 유적이 있다. 서천공주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중앙으로 지방도 제723호(충신로)가 종단하고 있다. 

충화면의 면적은 37.08㎢이며, 올해 6월 말 기준 인구는 658가구, 1056명(남자 556명, 여자 500명)이다.

충화면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복금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복심리(福深里)의 복(福) 자와 상금리(上金里)의 금(金) 자를 따서 ‘복금리(福金里)’라 했다. 백제 시대에는 가림군(加林郡)·대산현에 속했다. 고려 시대에는 가림군에 속했고, 조선 시대에는 임천군 가화면(可化面) 지역에 속했다. 1895년 북박면(北朴面)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금리, 하금리(下金里), 복심리와 북박면 소년동(少年洞)의 일부를 병합해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복금리로 개설됐다. 마을의 북쪽과 남쪽에는 낮은 산지가 분포하고 있으며, 중앙에는 복심저수지가 있다. 한편, 복금리 서쪽 지석리에서 칠산천이 발원해 복심저수지에 이르고 동쪽으로 흘러간다. 

복금리는 부여군 서남부에 있으며, 충화면의 9개 법정리 가운데 하나로 충화면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 임천면 발산리, 서쪽으로 팔충리, 남쪽으로 임천면 옥곡리, 북쪽으로는 만지리와 접해 있다. 행정리로는 복금1리, 복금2리, 복금3리가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금학, 대숲골(죽림동), 주복골(주복곡, 蛛伏谷), 어은골, 박전말, 매까실이 있다. 촌락은 산지 말단부에 형성돼 있으며, 농업 활동은 복금저수지 주변으로 발달한 평지에서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구릉에서는 밭농사가 이뤄지고 있다. 

복금리는 지난(2025년) 6월 말 기준 면적은 3.53㎢이고, 인구는 89가구, 148명(남자 83명, 여자 65명)이다. 복금리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은 복금2리마을로 14가구에 23명(남자 13명, 여자 10명)이 살고 있다.

■ 양화면서 가장 적은 ‘원당2리마을 주민 23명’
부여군 양화면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적량면과 홍화면의 이름을 따서 양화면이라 불렀다. 양화는 전북 익산, 충남 서천과 맞닿아 있는데 ‘웅포대교’를 건너면 익산이다. 부여와 거리가 있어 식사도 익산을 이용하고 장도 서천 한산장을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양화면은 부여군 남부에 있는 면으로 금강 연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체로 10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금강이 동쪽 면 경계를 흐르며, 여사천이 서쪽과 남쪽을 지나 금강에 흘러든다. 평야는 여사천 연안과 원당리·오양리 일대에 분포하며, 쌀과 함께 오이·토마토 등의 채소 생산량이 많은 지역이다.

군산~청양을 잇는 국도가 면의 중북부를 지나며, 웅포대교를 통해 전라북도 익산시와 연결된다. 행정구역은 입포·초왕·오양·족교·송정·벽룡·수원·상촌·시음·내성·원당·암수리 등 12개 리(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7개 리)로 구성됐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양화면 입포로53번길 6이다. 면적은 32.78㎢이며, 올해 6월 말 기준 인구는 1547명(남자 746명, 여자 801명)이다. 

양화면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원당리마을’은 북쪽의 시루산에서 남쪽의 망배산과 그 아래 산악산(山岳山)으로 산의 줄기 동쪽에 위치해 있다. 냇물은 서북쪽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금강에 유입하는 원당천이 흐르며, 서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에 ‘원당리(元堂里)’가 위치하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다.

백제 멸망 후 구수내골 주변에 인류가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으며 마을이 형성되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 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고, 조선 시대에 밀양박씨가 정착해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 상주이씨와 김해김씨가 정착, 집성마을을 형성하면서 조선 시대 중기에는 농경지 개간이 이뤄졌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 지역으로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원당(願堂)’이 있어서 원당(元堂)이라 불렀는데,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홍상면의 월은리 일부를 병합해 원당리(元堂里)라 했다. 

자연마을은 옛날에 내가마을로 흘렀고, 우물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구수이골 또는 구수천(九水川), 마을이 밧가운데 있다 해서 밭가운데라고 부르다가 밧간디, 전중촌(田中村)이라 부르고, 마을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새터, 양지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양지편, 마을에 원당이 있었으므로 원당, 원댕이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원당리는 1.95㎢ 면적에 원당 1, 2, 3리로 나뉘어 있으며, 66가구에 인구는 103명(남자 47명, 여자 56명)이다. 양화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은 원당2리마을로 15세대 23명(남자 10명, 여자 13명)이 살고 있다.

원당2리마을 정홍식 이장과 주민들은 “충화면에는 이미 학교가 한 곳도 없는 상황”이라며 “충화초, 양화초는 2025년 신입생을 단 한 명도 받지 못했어, 애들이 있어야지. 만약 양화초가 임천초등학교에 흡수되면 양화면에는 단 한 개의 학교도 남지 않게 된다”는 설명이다.

충남도교육청이 2026년 분교장 개편 예정 학교 10개교를 선정했는데, 이중 부여군 소재 학교가 무려 4개나 포함됐다. 통합 대상 학교는 용당초(학생 11명, 교직원 15명), 충화초(학생 12명, 교직원 15명), 옥산초(학생 11명, 교직원 15명), 양화초(학생 13명, 교직원 16명)로, 이 가운데 용당초와 충화초는 이미 통합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24년 부여군의 출생아 수는 111명으로,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2031년에는 상황이 더욱 암울할 전망이다.

부여군 소재 초·중학교들이 출산율 급감과 인구감소로 인해 통폐합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역사회가 학교를 중심으로 유지돼 왔던 만큼 학교 폐교는 곧 지역사회 존립 위기로 직결될 우려가 크다. 과거 부여군에는 총 55개 초·중학교가 있었지만, 그동안 32개교(초등학교 17개, 초분교 11개, 중학교 3개, 중분교 1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여 충화면 복금2리마을.
부여 충화면 복금2리마을.
부여 충화면 복금2리마을.
부여 충화면 복금2리마을.
부여 양화면 원당2리노인회관.
부여 양화면사무소.
부여 양화면 원당2리마을.
부여 양화면 원당2리마을.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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