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강경 옥녀봉에서 독립 만세 외치며 시작 ‘충청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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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강경 옥녀봉에서 독립 만세 외치며 시작 ‘충청 최초’
  •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 승인 2025.11.27 07:10
  • 호수 918호 (2025년 11월 27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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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16〉
1907년 4월 1일 공립 강경보통학교로 인가받은 강경중앙초등학교, 57명이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곳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은 오래된 역사와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다. 특히 옥녀봉공원은 빼어난 경관과 역사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곳이다. 해발 44m의 낮은 봉우리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금강과 강경의 풍경은 어떤 높은 산의 정상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석양이 질 무렵 붉게 물드는 강경의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옥녀봉공원은 강경의 역사와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있으며, 산책을 하며 사색에 잠길 수도 있는 곳이다. 곳곳에 자리한 유적들을 통해 과거의 흔적을 되새길 수도 있다. 역사와 자연, 그리고 여유로운 시간이 함께하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논산 지역에서 최초의 만세운동은 3월 5일 전북 익산의 군산영명학교 학생 강금옥(姜金玉)으로부터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전해 들은 엄창섭(嚴昌燮)이 부여군 세도면의 창영학교 학생들과 함께 주도해 3월 10일 강경의 옥녀봉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됐다.

따라서 강경의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0일, 강경읍 장날 오후 3시경, 옥녀봉에서 항일독립만세를 불렀다. 5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외쳤고, 일본 경찰의 무력 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옥녀봉 산정에 세워진 ‘강경항일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강경의 독립운동 정신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이곳에서 논산, 특히 강경 주민들의 뜨거운 독립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묵묵히 서 있는 기념비를 바라보며, 이 땅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정신을 되새겨 본다. 옥녀봉 정상에는 조선 시대에 축조된 봉수대가 남아 있다. 봉수대는 당시의 중요한 통신 시설로,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피워 급한 소식을 전달했다.

■ 강경에서 시작된 7차례의 3·1만세운동
3·1독립운동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强占)한 지 9년 뒤인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우리 한민족의 일대 독립시위운동이다.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와 농민들의 경제적 착취,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서거(逝去)가 일본인(日本人)에 의한 독살(毒殺)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한민족의 감정이 극도로 자극돼 마침내 구국의 항일독립운동으로 폭발했다. 또 하나의 3·1독립운동의 기폭제는 일본에 유학 중인 동경 유학생 600명이 1919년 2월 8일 동경(東京)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대한청년독립단 대표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후 학생대표들이 본국에 건너와 독립선언의 경과와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알림으로써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을 준 사건이다.

논산 강경에서의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해 3월 10일부터 4월 7일까지 일제의 식민지 탄압에 맞서 줄기차게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다. 강경은 논산 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전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세운동이 전개된 대표적인 지역이다. 주로 옥녀봉과 강경시장을 중심으로 농민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의 불길이 꺼지지 않자 징역과 고문, 태형 등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다. 또한 강경은 1924년 10월, 전국에서 최초로 신사 참배를 거부해 강경교회 주일교사와 주일학교 학생 57명, 일반 학생 5명 등이 면직과 퇴학을 당한 항일의 고장이기도 하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논산의 강경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장소로는 옥녀봉과 강경항일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는 강경성결교회를 꼽을 수 있다. 옥녀봉은 높지는 않지만, 정상에 오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강경의 전경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며, 해 질 녘이면 황금빛 물결이 강을 따라 춤을 춘다는 곳이다. 투명한 가을 하늘 아래 더욱 선명하게 펼쳐지는 풍경이 감동을 더하는 곳으로도 꼽히는 곳이다. 

논산 강경의 3·1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전북의 군산과 익산을 거쳐서 충남의 부여 세도를 통해 강경으로 전래된 만세운동이다. 1919년(기미년) 3월 10일부터 4월 7일까지 7회에 걸쳐 상가 철시 등 대규모(500명~1000명)로는 충청도에서 최초의 독립 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천안 아우내 장터보다 22일 먼저 시작했으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아 논산 지역의 애국애족, 민족정신이 역사 속에 감춰져 있었다. 강경 3·1독립만세운동 과정을 살펴보면 △1차 1919년 3월 10일 강경 옥녀봉에서 5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하면서 시가행진을 했다. △2차는 12일 강경경찰서 앞에서 시민 학생 100여 명이 손필규 등 독립운동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3차는 20일 옥녀봉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했으며, △4차는 31일 300여 상가 철시로 무언의 저항운동 시위를 했고, △5차는 4월 1일 일본인 상점 방화 시위를 했고, 상점 철시 중 강경에 또다시 1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6차 4월 4일 5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하며 몽둥이 등으로 경찰주재소를 습격했으며, △7차 4월 7일 장날 시위에 대비한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주민들은 야간에 산상 봉화 등 대규모 만세운동 전개를 한 것 등이다.

■ 최초 신사참배 거부, 노동운동 발원지
논산의 강경은 강경천과 논산천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발달한 천혜의 내륙항으로, 1930년대까지 금강 하구의 관문이었다. 강경시장은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였으나, 1889년 군산항의 개항과 경부선·호남선·군산선의 개통으로 상권이 쇠퇴했다. 지금의 강경은 옛 영화의 언저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몇몇 고층아파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낮은 건물이 논산평야와 높이를 같이하고 있는 곳이다. 깊은 맛과 향을 풍기는 젓갈처럼 오랜 시간 곰삭은 100년 전 풍경이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해 건물들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초 신사 참배 거부, 노동운동과 침례교 선교 발원지를 담은 근대문화와 옥녀봉을 중심으로 옛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옛 영화를 찾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변한 강경이지만 말이다.

‘자기들은 헛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리한 미신이며 또한 하나님 압헤 죄 됨을 깨닷고 신앙의 주를 굿게 직히여 절하지 아니하엿더니’라고 기독교잡지 ‘활천’(1924.10)에 기록돼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사참배거부운동’에 관한 기사의 일부이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국권을 잃은 이름만 남은 나라가 돼버렸다. 더욱이 일본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이는 충남 논산에 위치한 강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강경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터라 1924년 이전에 이미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특히 일제는 강경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옥녀봉에 신사를 건립했다. 옥녀봉은 유적지인 동시에 3·1독립운동 만세시위 현장이었기에 강경 사람들은 더욱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일제는 신사 참배에 강경의 모든 학생들을 동원했다. 그런데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 김복희와 학생 57명이 신사 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거부 이유는 위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사 참배를 강행한 조선총독부는 결국 교사와 학생들을 모두 학교에서 파면, 출교시키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1925년 조선 신궁 건립 등 신사 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 년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유일하게 어린이들에 의해 이뤄진 신사 참배 거부운동이자 신앙적, 민족적 저항이 결합된 운동으로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이 운동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강경성결교회에서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으로 일각에서는 천주교에서 주도한 운동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경성결교회의 담임 신영춘 목사가 ‘활천’과 ‘동아일보의 옛 기사’를 통해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임을 밝혀내고 ‘최초 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를 세웠다. 강경성결교회 앞마당에 설치된 기념비는 높이 5m로 김복희 교사와 학생들이 일제의 신사 참배에 거부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오직 민족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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