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선봉서며 세계 곳곳에 민족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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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선봉서며 세계 곳곳에 민족혼 불태웠다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1.0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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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서거 70주기 ② 독립운동 활발

 

▲ 기미년 3․1운동 당시 군중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모습


1905년 백담사로 출가 정식 승려… 국가독립 필요성 절감
1908년 일본서 신문물 공부 뒤 귀국 본격적 민족독립운동
만세삼창 선창후 체포… 옥중‘조선독립의 書’집필하기도
신사참배․일장기 게양 거부등 일제 저항정신 굽히지 않아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의 붕괴기에 태어나 현대사의 이른 새벽인 1944년 6월 29일까지의 일평생을 민족 독립운동에 바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결성 성곡리에서 태어난 만해는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청년이 되어 가담한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후 1905년에는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스승 연곡(連谷)의 밑으로 들어가 출가해 정식으로 승려가 됐고 같은 해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일제에 박탈당하자 국가의 독립을 위한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세력을 넓혀가는 것을 지켜보며 당시 세계에 대해 눈을 뜬 한용운은 황해도 원산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며 견문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시국에 다시 귀국했고 이후 190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을 공부한 뒤 귀국했다.
만해의 민족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즈음부터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만해는 곧바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서울 청진동에 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해 측량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높이려 했다.
1910년에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만해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전력을 다했고 연해주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만해는 민중의 의식개혁과 불교개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 같은 해 만해는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들을 만나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협의하기도 했다.
3·1운동의 전위지로 평가받는 ‘유심’도 이때 창간됐다. 당시 유심지는 단순한 종교지를 탈피해 민족의 전통문화지, 사상지, 언론지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3·1운동의 선봉에 섰던 만해 한용운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기미독립선언서 일부


독립운동가 만해의 대표적 족적은 역시 3·1운동과 ‘독립선언서’ 낭독이다.
기미년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외친 쾌거이자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번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표현한 대 민족운동이었다.
만해는 거사 당일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는 등의 단호한 결의를 밝힌 공약 3장을 덧붙였고 만세 삼창을 선창하며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3·1운동과 독립선언문 등으로 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은 한용운은 갖은 고문을 당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書)’를 집필하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진보의 길을 가로막는 일제의 군력·철포 정치는 결국 무력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담은 이 글은 ‘독립선언서’ 못지않은 명문으로 평가된다.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서도 그의 저항 정신은 전혀 굽힘이 없어 반일 모임이나 강연에는 빠짐없이 참가한다.
사상이나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만해는 1922년 5월 출옥하고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열렸을 때 세 명의 종교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한용운이 강연하자 청중이 극도로 열광하는 바람에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는 일문이다.
그는 같은 해 9월 ‘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고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대한불교청년회’의 총재로 취임해 활동하던 만해는 1926년 들어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다.
1927년 한용운은 좌·우파의 합작 노선에 따라 결성된 ‘신간회’ 발족에도 앞장서 중앙집행위원과 서부 대표를 맡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조병옥과 함께 지원에 나서고 1930년에는 불교계 청년들을 모아 비밀 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용운은 일생에 걸쳐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황병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일체의 강연도 하지 않았다.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한 거의 모든 문인이 끝끝내 변절하고 말지만 그만은 다른 면모를 보였다.
신사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아예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는 등 만해는 그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에까지 일제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말 것을 일평생 강조하며 살았다.
만해 한용운은 꺼져가는 민족혼의 불씨를 지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유, 평등, 평화의 비폭력 정신으로 민족의 내일을 일깨운 선각자였다.

 

 

 

 

 

만해

 

 

 

 

▲ 만해 한용운 수형기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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