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형! 큰일났어.”
손오공이라도 된 양 오색구름 위에서 뿅뿅 헤매던 왕순의 기분은 진호의 숨 넘어가는 소리에 금새 땅밑으로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이 녀석아. 청소나 열심히 할 것...”
단꿈 깨진 심통으로 짜증을 내던 왕순의 얼굴이 말끝이 흐려지는 것과 동시에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왕순씨. 히히.”
허연 허벅지를 다 드러낸 미니스커트를 입은 미애가 장미꽃 한다발을 내밀며 들어섰다.
“어..어쩐 일이세요?”
“네. 지난번에 문에 끼이는 바람에..호호. 드리려고 가져왔던 장미꽃을 못드렸었잖아요. 그래서 오늘 새로 사왔어요. 또 지난번 일도 사과드릴 겸..”
“그런 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
“전 매일밤 꿈에서 왕순씨를 만나요. 저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시던 그 고마우신 모습을..”
미애는 한 번 달라붙으면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끈적끈적한 눈으로 왕순을 쳐다보며 다가섰다.
“네. 고맙게 받겠습니다.”
왕순은 온몸이 구렁이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끼쳐와서 얼른 꽃다발을 미애의 손에서 나꿔채며 옆쪽으로 슬쩍 빠졌다.
“야, 진호야. 이거 꽃병에 담아서 책상 위에 올려 놔라.”
“꽃병이 어딨어요?”
“응? 없어? 아무려면 어때. 사이다병에라도 꽂아놓지.”
왕순은 계속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는 미애의 눈길에 숨이 막혀왔다.
“미애씨. 저 지금 배달 가야 하거든요. 좀 쉬다 가십시오.”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지를 발휘한 왕순이 장갑을 끼며 뒤돌아섰다. 그러나 문을 나서려는 왕순의 발은 목뒤를 잡아끄는 묵직한 힘에 엉켜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악! 공포영화를 볼 때보다 더 끔찍한 전율이 몸 전체를 강타했다. 미애의 성난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왕순씨. 미꾸라지처럼 살살 빠져나가면 재미 없어요.”
미애는 이를 악물고 왕순을 노려보았다.
“동네사람 다 있는데서 내 배 위에까지 올라탔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녜요?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면 그때 본 사람들 모두를 증인으로 내세워서 고소하고 말거에요.”
실눈을 하고 여유만만하게 내뱉은 미애는 태연스럽게 방문을 열고 올라서 방안에 벌러덩 누웠다.
‘아이구, 물렸구나. 물려도 살모사에게 단다니 물렸어. 이 노릇을 어쩌면 좋으냐. 아이고..’
얼빠진 듯 서있던 왕순은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진영은 안절부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근심스런 얼굴로 문을 쳐다보았다. 싸늘해보이는 수미의 빈자리가 휑뎅그레 커보였다.
‘무슨 일일까? 생전 결석같은 건 안하던 애인데.’
잡고 있는 영어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