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 수업 가장 좋아했던 한국‘화단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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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 수업 가장 좋아했던 한국‘화단의 거장’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6.0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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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 <1>

총괄-고암의 생애

 


그리기 수업 가장 좋아했던 한국‘화단의 거장’


분단이데올로기에 희생된 불운의 화가, 한국화의 독창적인 재해석, 문자 추상, 서예적 추상.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및 한국 화단의 거봉으로 우뚝 선 고암 이응노에게 붙는 수식이다. 올해는 고암 이응노가 탄생한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홍성군에 자리한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에서는 화백의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상설·특별전을 준비하는 등 고암 이응노 알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본보는 이에 맞춰 고암 이응노의 생애와 세계 화단에서 활약했던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기 위한 기획취재 ‘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를 8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홍북 중계리 출신 홍성초 다녀
그림 그리는 걸 싫어한 아버지 꾸지람 들으면서도 그림 그려 


이응노(李應魯, 1904~1989)는 1904년, 현재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이 자리한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응노는 백월산과 용봉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이후 일곱살 무렵에는 홍성초등학교에 진학해 신식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보통학교 시절 이응노는 지금의 미술시간에 해당하는 ‘도화’시간과 글자를 쓰는 ‘습자’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그림 그리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양반집 자손으로 태어나 어찌 그림을 그리려 하느냐’며 늘 꾸지람을 주셔서 아버지 몰래 담벼락, 쌓인 눈, 진흙으로 범벅된 발등, 그을린 살갗, 돌멩이 등 손에 잡히는 모든 것에 그림을 그려 갖고 다녔다”고 추억했다.

열아홉살 되던 해 여름, 이응노는 화가가 되기 위해 가출하다시피 집을 떠났고 마침내 1922년 그의 작품세계의 기반을 형성시켜 준 해강 김규진 화백의 수하로 입문했다. 이응노는 해강의 밑에서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 등 전통 문인화와 서예를 두루 익혔다. ‘죽사(竹史)’라는 호도 이 무렵 해강이 붙여준 것이다. ‘대나무처럼 늘 곧고 푸르게 살라’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1년간 해강의 밑에서 전통 문인화를 익힌 이응노는 이듬해인 1923년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대나무 그림으로 입선에 뽑히며 화단에 정식으로 진출하게 된다.

해강에게서 독립한 이응노는 전라북도 전주로 거처를 옮겨 ‘개척사’라는 간판점을 열고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작품 활동으로 화단의 관심을 받았다. 1931년 이응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대나무 작품으로 또 다시 입상하고 이때 호도 죽사에서 ‘고암(顧菴)’으로 바꿨다. 고대 중국의 화가 고개지의 성을 따 고개지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이응노는 개척정신이 남달랐던 화가로 전해진다. 1930년대 조선으로 서양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회화가 유입되면서 이응노는 전통회화와 접목시키기 위한 방법을 골몰하다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6년 그의 나이 서른셋의 일이다.

일본에서 이응노는 현재 요미우리신문의 배달소를 운영하며 틈틈이 작품 활동을 병행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자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수덕사 인근 수덕여관을 인수해 작품 활동을 하다가 마흔다섯이 되던 1948년 홍익대학교 주임교수가 돼 동양화과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게 된다. 1951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수덕사 인근으로 내려왔던 이응노는 2년 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이때 그의 그림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장보는 사람들, 고된 일을 하는 인부 등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아픔이 묻어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로 정식 진출 세계 곳곳 다니며 이름 알려
간첩사건 연루되며 옥살이도 1983년 프랑스 귀화 여생 보내

 

 

 

 

 


고암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한 것은 1956년 프랑스 미술 평론가 자크 라센느의 초청으로 뉴욕에서 열린 현대한국미술전에 출품하면서 부터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에 오른 이응노는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동양화와 서양화를 접목시킨 수많은 추상작품들을 남기며 유럽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때 이응노의 대명사로 불리는 ‘문자추상’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유럽평단으로부터 ‘동양예술과 서양예술의 절묘한 조화’라는 극찬을 받았고 유럽전역서 각종 초청전시가 줄을 잇게 된다. 유럽에서 활약하던 그에 관한 소식은 전시 이후 혼란했던 국내에는 별반 소개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에 연루되며 간첩화가라는 낙인이 찍힌 이후로는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이응노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후 수덕여관에 칩거하는 동안 밥알로 조형물을 만들거나 바위에 암각화를 새기는 등 불타는 예술 혼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이응노는 1983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에 귀화, 1989년 파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후 고국 한국 화단에서는 이응노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각계각처에서 전시회를 여는가 하면 대전에 이응노미술관이, 홍성의 생가터에는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등이 들어서며 뒤늦게 작품세계가 재조명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현재 이응노생가기념관에서는

“구술사, 110주년 특별전 주력”



고암 이응노의 고향인 홍북면 중계리에 지난해 문을 연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은 올해로 개관 3주년을 맞았다. 홍성지역에 이렇다 할 전문 미술관이 없던 상황에서 이응노기념관 측은 그간 ‘고암과 오늘의 시대 정신’ 기획전과 더불어 ‘예술마실’, ‘미술과 연극의 만남’ 등 성인·아동 대상의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홍성군민에게 새로운 예술문화 향유의 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군은 그간의 가시적인 성과와 더불어 기념관의 미래가치를 인정받아 기념관과 홍천마을을 중심으로 예술마을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2550만원의 국비를 확보해 ‘홍천 고암예술마을 조성’과 관련한 컨설팅 용역을 실시, 향후 자립형 예술문화마을의 모델을 제시하고 농업과 예술이 이상적으로 결합한 명소를 만들어낸다는 방침이다. 학술적인 연구 분야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내고 있다.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윤후영 큐레이터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안으로 이응노와 관련한 구술사 작업이 마무리 될 예정이다. 윤 큐레이터는 “그간 이응노 화백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을 만나 화백과 얽힌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주력했다”며 “각종 기록들이 모두 수집되면 향후 발간사업을 통해 책자로 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구술사 작업은 이번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향후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화백의 아들과 조카 등 2차 주변인으로 확대해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념관에서는 올해 고암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이응노의 대나무 그림을 한 데 모은 상설·특별전을 기획하고 있다. 오는 7월 일반에 공개되는 이번 전시에는 죽사라는 호가 붙을 만큼 대나무 그림에 정통했던 고암의 대표 작품들이 선보인다. 기념관 소장품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청관재(개인), 대전이응노미술관 등의 협조를 구해 진행될 예정이다. 윤 큐레이터는 “고암의 작품 중 작품성이 뛰어난 대나무 그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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