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가지 몇 잎새만이 겨우 붉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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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가지 몇 잎새만이 겨우 붉어졌구나
  • 장희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4.06.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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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구 박사의 번안시조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24>

 

거북은 기린·봉황·용과 더불어 ‘4령’(四靈)으로 불린다. 기록에 의하면 1000살 먹은 거북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고 털이 난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일대에서 거북은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 노래에서 거북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을 드러내게 하는 동물로 나온다. 바위 또한 흔히 천년을 버텨온다는 말이 있듯이 거북과 바위는 일반적으로 장수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를 담는 구암사를 찾아 초가을을 맞이하는 심회를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龜巖寺初秋 (구암사초추)
가을 되니 마음 맑고 달빛 달린 박꽃 흴 때
서리 앞 남쪽 골짜기 단풍 숲 속삭임에
몇 잎새 겨우 붉어졌구나, 서너 가지 끝에서.

古寺秋來人自空 匏花高發月明中
고사추래인자공 포화고발월명중
霜前南峽楓林語 纔見三枝數葉紅
상전남협풍림어 재견삼지수엽홍

서너 가지 몇 잎새만이 겨우 붉어졌구나(龜巖寺初秋)로 번안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옛절에 가을이 되니 마음만은 저절로 맑아지고 / 달빛 속에 높이 달린 박꽃이 희구나 // 서리 앞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의 속삭임에 / 서너 가지 몇 잎새만이 겨우 붉어졌구나]라는 시심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마음만은 맑아지고 달빛 달린 박꽃 희네, 단풍나무 속삭임에 붉어지는 몇 잎새만’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구암사 초겨울의 단상(斷想)]으로 번역된다. 구암사는 여러 곳에 있다. 충남 금산, 대전 유성. 경북 울진, 전남 순창, 전남 진도 등 5군데에 이른다. 구암(龜巖)이란 이름이 좋았던 모양이다. “오래 사는 거북처럼 우뚝하게 서 있는 바위” 뜻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어디에 있는 구암사 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구암사를 찾아 초가을의 심회와 단상을 그려 본다.
가을이면 오곡백과가 무르익기 때문에 마음이 절로 맑아졌다. 그래서 시인은 옛절에 가을이 되니 마음이 절로 맑아지고, 달빛 속에 높이 달린 박꽃이 그지없이 희다는 시상이다. 선경이라고 했지만 달빛 속에 높게 달린 박꽃이라는 시심은 한껏 차원이 높아 보인다. ‘흰 꽃=둥근 박=밝은 달’을 동격으로 생각하는 시적인 묘미를 발휘했다.
이어지는 화자의 시상은 한껏 더 밝혀 보인다. 단풍나무는 제각기 자랑했던 색깔이 서리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이를 화자는 시상의 얼개에 촘촘하게 읽혀놓았다. 서리 앞의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 속삭임에 서너 가지 몇 잎새가 겨우 붉어졌다는 시어들 때문이다. 단풍나무는 무엇이라고 속삭였을까? “너희들 고까옷을 입고 자랑했지만, 내 입김 스치고 나면 어림없을 걸”이란 메시지 한 마디 쯤은 능히 던졌을 것이라면서.

<한자어 어구> 
古寺: 옛절. 秋來: 가을이 오다. 가을이 되다. 人: 사람. 自空: 저절로 비다. 저절로 맑다. 匏花: 박꽃. 高發: 높이 발하다. 月明中: 밝은 달빛 속. // 霜前: 서리 앞에. 南峽: 남쪽 골짜기. 楓林語: 단풍나무의 속삭임. 纔: 겨우. 見三枝: 서 너 가지가 보이다. 數: 몇 개. 葉紅: 붉은 나무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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