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시리즈 1(커피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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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시리즈 1(커피 예찬)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4.07.0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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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있다.
오전 아홉시쯤 연구실로 출근하여 지난해 구입한 싸구려 에스프레소 머신에 익숙한 듯이 커피를 내린다. 커피가 진하면 진할수록 좋기 때문에 원두를 필요이상으로 잘게 분쇄한 다음 머그컵 반잔 정도의 물을 기계에 넣어 2잔의 앙증맞은 에스프레소를 만든다. 커피가 내려지기까지 보통 2~3분이 소요되므로 그 동안 컴퓨터를 켜놓거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거나 창문을 열어 밤사이 축적된 연구실의 쾌쾌한 냄새를 환기시킨다. 사약(賜藥)같은 두 잔의 에스프레소를 내려 한 잔은 적당히 식혀 단숨에 들이켜고 나머지 한 잔은 다시 뜨거운 물과 3:1 비율로 섞거나, 여름철에는 얼음을 넣어 약간 희석시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면 그날 하루를 시작할 모든 준비는 끝이 난다. 기본적으로 에스프레소의 매력은 고소하면서도 기분 좋은 쓴맛에 있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뽑으면 크레마(crema)라는 옅은 갈색의 크림층이 생기는데, 이는 커피 원두에 포함된 오일이 증기에 노출되어 표면 위로 떠오른 것으로 진한 커피 향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크레마의 정도에 따라 에스프레소가 잘 추출되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마실 때는 향을 먼저 맡고 크레마에 입술을 살짝 대어 맛 본 다음 몇 번에 걸쳐서 마신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커피를 왼손으로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몇 모금 마시면 그제야 내 몸 속의 모든 세포들이 번뜩하며 일어남과 동시에 일상의 생활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출근하는 교직원들의 모습과 강의실로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보이고,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가 그 커피를 완성할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렸던 것처럼. 만약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기라도 하면, 나는 그날 더욱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커피의 기원은 불명확하나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은 이슬람교도들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슬람의 와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커피는 술을 마실 수 없었던 무슬림의 독특한 종법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한다. 커피에 관련된 무슬림의 재미난 이야기중 하나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졸음을 이기려 애쓰고 있을 때 하늘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음료를 주고 갔는데, 이 음료가 바로 커피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커피는 천사의 음료, 또는 신의 선물이라고 명명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이 ‘천사의 음료’를 사랑한다. 커피를 마시며 하루의 일정과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한다. 수업에도 항상 커피 머그잔을 가지고 들어간다. 강의를 듣는 학생이 사온 커피가 교탁 앞에 놓여 있으면 그 수업에서는 두 잔의 커피를 마셔야 하는 행복한 경우도 종종 생긴다. 수업 중에 마시는 커피는 강의 도우미와 같다. 강의 중에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자연스러운 진행을 생각할 수도 있다. 다양한 학생들의 질문을 받으면 바로 대답하기보다는 커피 한 모금 마시며 보다 더 깊이 있고 자세한 대답을 준비하기도 한다. 또한, 학생들이 해온 과제가 나의 기대에 못 미칠 때 커피 한 모금으로 실망과 화를 삭이기도 한다.

커피는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해준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커피를 사이에 두고 옛 일을 이야기하며 시시덕거릴 수 있고, 업무상 만나는 어려운 자리에서는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연인들은 커피를 핑계로 조금 더 함께 사랑을 속삭일 수 있고, 이상형을 기대했으나 정반대의 경우가 된 맞선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얼굴 대신에 커피 잔을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큰 실례는 아닐 듯싶다. 나는 커피의 기원이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할뿐더러 전혀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나 신의 선물이란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몇 시간 동안 전혀 진척이 없는 지지부진한 음악 작업에서, 지나간 과거에 대한 쓸쓸한 회상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자연의 경치 앞에서 나는 늘 커피와 함께 하고 싶다. 커피가 나에게 주는 위안과 사색과 여유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이것이 내가 매일 10잔 이상의 커피를 내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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