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곽에서 작품 활동 매진… 짙게 배인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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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곽에서 작품 활동 매진… 짙게 배인 예술혼
  • 홍주일보
  • 승인 2014.07.1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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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6>

파리의 작은 골목이 이색문화공간으로…

 


세르누쉬 박물관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고암 이응노 화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이 있다. 프레 생 제르베(pre st. gervais)의 아틀리에, 페르 라쉐즈 묘지가 그곳이다. 고암 아틀리에는 파리와 북동쪽으로 맞닿은 교외인 프레 생 제르베에 위치해 있다. ‘아틀리에’는 화가, 사진가, 건축가 등의 예술가들이 작업하는 공간을 일컫는 곳으로 당시 고암은 구두를 만들던 공방을 개조해 아틀리에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고암 아틀리에는 지하철 메리 데 릴라(Mairie des Lilas) 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르 프레 생 제르베(Le Pre St Gervais)라는 지역의 상트 데 코르네트(Sente des Cornettes) 17번지다. 역에서 나와 몇 개의 큰길을 건너면 어렵지 않게 고암 아틀리에를 발견할 수 있다. 큰길에서 내림 골목길로 꺾어 내려가 서너 채 지나지 않아 고암의 집이 보인다. 고암 아틀리에의 담벼락은 자체가 작품이다.

손수 제작한 구운 테라코타와 세라믹으로 벽화를 만들어 길벽이 화폭이 됐다. 집 벽은 깨진 기와, 벽돌, 나무 조각 부조 등으로 마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고암은 철제나 목조를 이용한 작업과 태피스트리, 도자기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 집 마당에는 대나무가 지붕까지 솟아있고 외부 벽에는 고암이 직접 제작한 벽화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나무는 높이가 상당해 적어도 오랜 세월동안 건물과 함께 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암 이응노가 직접 심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네에서는 특이한 벽화가 있는 집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벽화에는 군상들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고암은 접시를 깨뜨린 후 조각들을 다시 조합해 붙이고 조개로 입을 만들어 군상의 얼굴을 완성했다. 고암 아틀리에는 현재 일본인 화가의 작업실로 사용되고 있다. 사적인 공간이기에 내부의 모습은 아직까지 공개된 적이 없으나 인근 부동산 업자 등에 따르면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내부 인테리어는 전면 개조됐다고 한다. 고암 아틀리에가 위치한 거리는 최근 파리시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좁은 골목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종종 찾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고암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파리의 한 작은 골목이 이 시대의 파리지성들로부터 이색적인 문화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고암 아틀리에는 고암이 파리에서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고암은 80대라는 고령에도 작품활동을 쉬지 않았는데 80세 때 프랑스로 귀화 이후 일본, 파리, 뉴욕 등지에서 수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이후 86세 되던 19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파리 보인병원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머나먼 타국에서도 늘 고향 홍성을 그렸던 고암이었지만 결국 그는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Pere Lachaise) 묘지에 안장됐다. 파리의 북동쪽에 위치한 페르 라쉐즈 묘지는 1862년 빅토르 위고(1802~1885)가 쓴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이 마지막 숨을 거두고 묻힌 곳이다. 이 묘지는 음악가 쇼팽, 작가 라퐁텐느, 화가 모딜리아니, 가수 에디트 피아프, 작가 오스카 와일드, 음악가 비제 등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묘지라기보다 하나의 마을이다. 묘지는 파리에서도 제일 큰 43㏊의 규모로 17세기에 만들어졌고 1804년에 틀을 잡았다고 한다. 짧게 잡아도 200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죽은 자의 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다. 페르 라쉐즈에서 고암의 묘소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공동묘지의 광대한 넓이만큼이나 이곳에 묻힌 유명 인사들의 수는 수백명에 이르기 때문에 관광객을 위해 제작된 안내지도에서는 고암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고암의 묘소는 7번 구역에 위치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조성된 지 기 백년은 되어 보이는 육중한 묘석들 사이로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듯한 대리석의 묘소가 눈에 띈다. 묘비에는 ‘MAITRE UNG NO LEE, seoul 1904·paris1989’라고 씌여져 있다. ‘거장 이응노,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9년 파리에서 떠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고암의 묘석 위에는 최근에 누군가가 올려놓은 작은 꽃화분들이 놓여있었다. 그의 가족이거나 제자, 그를 사랑하는 후배 예술가들의 손길일 것이다.

인터뷰
                                 “한·중·일 통틀어 명성 높은 화가” 

현재 세르누쉬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은 약 100여건에 이르고 있다. 파리에서 아시아계 화가 중 특정인의 작품이 다수 소장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례적이지만 세르누쉬 박물관 측의 고암에 대한 연구와 애정은 유럽 내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 하다.  매리본느 딜로(Maryvonne Deleau) 세르누쉬 박물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고암과 세르누쉬 박물관과의 인연에 대해 들어봤다.

-고암 작품이 상당하다. 소장하게 된 연유는?
“1950년대에 몇몇의 한국 예술가들이 파리로 왔는데 그 중 이응노도 있었다. 이응노는 당시 세르누쉬 박물관 관장이었던 엘리셰프(Elisseef) 씨와 친분이 두터웠다. 이응노의 작품을 사랑했던 당시 관장은 그의 작품을 꾸준히 소장하기 시작했고 그때 파리에 동양그림을 소개하는 아카데미를 열게 됐다. 당시 이응노는 한국화를 가르쳤다.”

-고암의 작품을 일반에 공개하기도 하는지 


“현재 세르누쉬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들은 조각품이나 도자기 종류이다. 회화작품은 관리가 특히 까다롭기 때문에 외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특별전을 개최해 일부 회화작품들을 주제별로 소개하고 있다. 몇해 전에는 아시아계 근대화가들을 주제로 기획전을 열었었고 그 중 이응노의 작품도 다수 포함됐다.”

-프랑스에서 고암의 위상은 어떠한가
“어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라 하더라도 한 작가에 대해 100여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만큼 이응노의 작품에 대해 세르누쉬 박물관이 깊은 애착을 갖고 있고 그만큼 이응노의 명성도 높다. 이응노는 파리생활에서 한국작가로서는 큰 명성을 얻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재 큐레이터들이 이응노의 작품을 많이 찾고 있으며 ‘훌륭한 작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서예, 회화 분야에서 탁월한데 한·중·일을 포함해 이응노 만큼 명성을 얻은 작가도 드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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