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가장 컸던 교우촌 신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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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가장 컸던 교우촌 신리성지
  • 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14.07.2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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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 기념관

 


솔뫼성지에서 남서쪽으로 6㎞ 정도 떨어진 당진군 합덕읍에 소재한 신리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신자와 순교자를 끊임없이 배출한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엔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와 조선의 제5대 교구장 성 다블뤼 안 주교의 주교관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2006년에 지은 성 다블뤼·성 손자선 기념성당은 가톨릭교회가 내세운 고딕양식이 아닌 현대식 건축양식으로 축성됐다.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머리 없이 발견된 무명 순교자의 묘와 14기의 손자선의 가족 순교자 묘 등 40여기에 달하는 순교자 묘가 공동으로 안장돼 있다. 신리성지에 있는 ‘조선교구청’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제5대 조선교구장 안 다블뤼 주교가 이곳에서 순교사료를 정리하고 성서의 한글번역작업 등을 수행하다가 붙잡혀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에서 처형당한 비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리성지는 조선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교우촌을 기념해 조성됐다. 신리는 간척사업으로 논이 생기면서 새로 생겨난 마을로, 이존창에 의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곳이다. 1865년 위앵 신부가 신리에 들어왔을 때 400여명의 주민 모두가 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1986년 병인박해 때 위앵 신부는 물론 신자 42명이 순교했다. 단일 마을로는 희생자가 가장 많았는데, 이로 인해 교우촌은 완전히 초토화됐다는 것이다. 논 한 가운데 1만여평 부지에 조성된 신리 성지에는 성인 반열에 오른 손자선의 생가와 다블뤼 주교 동상, 기념 성당, 다블뤼 주교 기념관 등이 있다. 2004년에 복원된 손자선 생가는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자 조선교구청으로 사용됐다. 다블뤼 주교는 한국천주교의 은인과 같은 존재다.

초창기 한글 교리서를 저술했으며, 조선교회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정리해 파리외방선교회에 보낸 ‘다블뤼 비망기’는 훗날 한국천주교사와 순교사의 기념비적인 토대가 됐다. 신리성당 다블뤼 주교 기념관에는 다블뤼 주교의 후손들이 다블뤼 주교가 순교당시 입었던 옷과 용품 등 30여 점을 기증해 전시되고 있다. 신리성당 김동겸 신부는 “과거 삽교천을 막기 전에는 신리성지 앞까지 배가 들어왔다”며 “신리는 평야지대이자 어느 지역에도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월경지여서 병인박해 전까지 선교사들의 피란처가 됐다”고 설명한다. 위앵 신부나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들이 남긴 글을 보면 이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순교를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는 설명이다.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심은 한국천주교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돼 모질고 잔인한 박해를 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진, 서산, 홍성 등 내포지역은 조선 말 중국과 연결된 해로를 통해 천주교가 이른 시기에 보급돼 가장 융성한 곳으로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한국 천주교의 요람역할을 하면서 굳건히 복음을 지켰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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