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매장·참수형 순교자 3000여 명 넋 서린 곳, 해미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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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매장·참수형 순교자 3000여 명 넋 서린 곳, 해미순교성지
  • 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14.07.3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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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나흘째인 8월 17일에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순교성지를 방문해 아시아 주교들을 만나고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한다. 교황 방문을 계기로 충남도와 당진시, 서산시, 홍성군 등은 천주교성지를 연결하는 순례길 및 관광 코스를 확대할 계획이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당진 솔뫼성지에서는 15일 ‘아시아의 젊은이여 일어나라, 순교자의 영광이 너희를 비춘다!’라는 주제로 아시아 22개국 2000명과 한국 4000명 등 6000명이 참가하는 아시아청년대회 개막에 이어 16일 오후 2시부터는 참가자 6000명이 함께하는 도보성지순례가 한서대~해미읍성에 이르는 4.5㎞구간에서 진행된다. 이어 오후 7시부터 해미읍성에서는 파이널 페스티벌이 열리고, 17일 오전 11시부터 해미성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의 시간이 마련되고, 오후 4시부터는 교황이 집전하는 청년대회 폐막미사가 2만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다. 해미순교성지는 천주교의 박해가 심해지던 1790년부터 100여 년 동안 수천 명이 처형된 곳으로 전해진다. 정사박해(1797) 때부터 병인박해(1866)기까지 무명 순교자 수천 명을 배출한 성지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10년간 옥살이를 하다 죽었다. 조선 후기에는 15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무관이 해미현감을 겸해 통치했다.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권한을 가졌던 무관은 공명심에 신유(1801)·기해(1839)·병오(1846)·병인(1866)박해 등 조정의 공식적인 천주교 탄압 외에도 천주교인들을 해미진영(지금의 해미읍성)에 마구 잡아들여 수천 명을 처형했다. 병인박해 때에만 1000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조정에 보고가 됐지만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김진후, 인언민, 이보현 등 3명만이 시복시성(諡福諡聖)됐다. 해미순교성지는 생매장 순교지로도 유명하다. 해미순교성지가 있는 해미면은 내포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요충지다. 해미진영장은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분 삼아 독자적인 처형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서해안 일대에서 붙잡힌 천주교 신자를 처형했다.

사대부들은 충청감사가 있는 공주나 홍주진영으로 이송됐고,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은 이름 없는 서민들이었다. 해미에서는 1790년대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 3000여 명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된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사약, 몰매질, 교수형, 참수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했지만 천주교인이 너무 많아 처형하기 힘들자 해미천 옆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했다. 생매장될 때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여수(여우)머리’로 잘못 알아들은 사람들이 이곳을 ‘여숫골’이라 불렀다. 연못에 수장한 신자도 적지 않았다. 그 연못은 ‘진둠벙’이라고 불렸다. 진둠벙은 병인박해(1866∼1868) 때 해미읍성의 처형장이 넘쳐나자 두 팔이 묶인 신자들을 벌판에 있는‘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마구잡이로 밀어 넣어 생매장한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죄인둠벙’이었다가 점차 진둠벙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클로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박해가 이뤄지는 동안 해미진영에 있는 큰 감옥 2채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지방에 끌려온 천주교인들이 항상 가득 차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감옥 터 호야나무에는 당시 손발과 머리채가 묶인 순교자들을 매달았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서산본당의 범 베드로 신부는 1935년 생매장 순교자 유해를 찾았고, 이후 발굴 현장에서 나온 뼈와 치아, 머리카락으로 기념관이 세워졌다. 1975년 유해 발굴지 인근에 높이 16m의 해미 순교탑과 야외 미사장이 세워졌고 2003년에는 성금을 모아 성당이 건립됐다. 지금은 논밭으로 개간됐지만 병인박해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숲정이’라 불렸다. 마을사람들이 땅을 일굴 때 수없이 많은 유해가 나왔는데 뼈들이 수직으로 선 채로 발견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생매장의 증거인 것이다. 지금도 둠벙과 유해 발굴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상을 말해주고 있다. 서산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해미순교성지 방문을 앞둔 가운데 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이다. 교황이 방문하는 해미면 도심의 환경개선과 편의시설 마련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해미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와 관광객들에게 쾌적한 이미지를 제공하고자 해미읍성~해미순교성지까지 1.5km 구간에 대해 대대적인 간판정비 사업도 벌이고 있다. 130여 상가를 대상으로 업소의 특성을 반영한 입체형 가로간판을 8월초까지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간판의 규격과 글씨를 통일하고 야간에 돋보이도록 LED조명을 내장한다는 것이다. 관광객과 순례객들을 위한 볼거리도 마련된다.

순례길과 시가지 주요 도로변의 가로화단 4km는 무궁화 분 200여점과 가우라 등의 꽃 30만 본으로 꾸밀 계획이다. 주요 교통섬 25개소에는 꽃 조형물, 토피어리, 플랜트 화분 등의 입체적인 조형물을 설치해 환영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위한 안전대책 마련에도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서산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를 위해 민·관 합동점검반을 편성해 해미읍성을 비롯한 행사장과 주변 시설물에 대한 건축, 전기, 소방 등 분야별 대책을 꼼꼼히 살피고, 방문객들의 편의 제공과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교황의 이동로와 주요 도로에 대해서는 인도 설치와 도로 정비사업도 벌이고 있다. 백성수 해미성지 신부는 “해미순교성지는 옥사에서 끌려 나온 교인들이 읍성의 서문 밖에서 처형당했거나 해미천이 바다와 만나는 끝머리로 끌려가 참수 당한 곳이다.

산 채로 생매장당한 사람도 많았다”고 전하며 “최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앞두고 해미순교성지에는 벌써부터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며 “해미순교성지에는 교황 방문에 대한 기대감으로 평일 200여명, 주말에는 400여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과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 해미순교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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