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사, 다산 정약용을 꾸짖다
상태바
홍주목사, 다산 정약용을 꾸짖다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09.04 15: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8>

홍주천주교회사4
1795년 7월 25일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정3품), 정약용을 금정찰방(종6품)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주와 홍주는 사학(천주학)이 심했던 곳으로 왕의 총애를 받던 두 인물이 ‘천주교 혐의’를 빨리 벗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참 운이 없었다. 이미 벗어버린 천주교도 혐의였다. 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있었던 명례방 집회를 형조의 금리들에게 들켜 첫 번째 천주교 사건을 일으킨 이후 정약용은 신자임을 강하게 부인했다.

셋째형 정약종이야 더욱 더 신앙을 고수했지만 둘째형 약전과 자신은 달랐다. 세월이 흘러 묻혀 지는가 싶었다.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으로 재차 발목이 잡힌 그들은 확실한 물증을 보이지 않는 한 한양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믿기지 않지만 중국인 신부가 입국한 사실이 드러났다.

 

 

 

 

 


음력으로 1794년 12월 말 한양의 계동에 숨어 든 주문모(야고보)신부는 홍주 덕산출신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머물며 성무 집행을 이어갔다. 정작 주신부를 입국시켜 포교를 하게 한 주된 인물이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고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귀에 까지 들어갔으며 정조는 물밀 듯 밀려드는 상소를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한양에서도 먼 곳으로 보내되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명분을 찾을 수 있는 곳, 그곳이 홍주와 충주였던 것이다. 임금의 이야기는 이렇다.

“전 승지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제수하니 무슨 면목으로 조정에 나와 사은을 하겠는가? 즉각 출발해서 목숨이나 살아 한강을 넘어올 방법을 도모케 하라.”

우부승지에서 7품계가 떨어진 찰방으로 부임한 지역은 어디인가?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큰 동네에 금정도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홍주목 관할이다. 게다가 역속(驛屬)들이 천주교 신자들이 거반이었다. 홍성에서 용당리를 찾아 가기 바로 전 화성면 농암리 산자락에는 최씨 문중들의 땅을 발판으로 줄 무덤이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생가도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 근방에서 홍주옥에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가 태어났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기 좋은 환경이다. 당시 정약용이 찰방으로 있을 때도 신자들이 많았다고 하니 정약용이 죄를 벗기에 참 좋은 곳이 아닐 수 없다. 왜 하필 화성면 이었을까?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승 번암 채제공 덕분이다. 남인의 대표로서 젊은 유망주 정약용을 잃기 아까웠을 것이다.

화성면 구재리는 채제공의 고향으로 용당리 근처 동네다. 현재 구재리 마을 화성중학교 뒷산에는 채제공의 영정을 모신 ‘상의사’가 있다. 당대의 최고 정승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던 정약용은 눈에 띄는 행보를 통해 은혜 갚기를 실천한다. 역졸들을 불러 놓고 알아듣기 좋게 정학인 유학의 중요성과 사학의 좋지 않음을 가르쳤는데 효과가 컸다고 한다.

그리고 예산에 사는 성호 이익의 종손자 이삼환과 함께 온양의 봉곡사에서 ‘성호 이익 강학회’를 열었다. 강학회는 열흘 동안 계속되었고, 성호의 「가례질서」가 강학의 표준이 되었다. 정약용이 주자를 강조한 이유는 어쩌면 죄를 벗기 위한 자기 방어일 수 있다. 1779년 있었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가 이익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자.

“저는 요즘 퇴계 선생의 유집을 얻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실마리를 찾아봅니다.-<중략>-퇴계 선생의 이 오래된 책이 참으로 이 사람의 병증에는 맞는 약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약용은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거 한다. 이기경과 홍낙안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을 잡아들인 것이다. 이름을 바꿔가며 피해 다니던 이존창을 금정 찰방 정약용이 잡았다는 소식은 주변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정조는 이 사건으로 다산을 불러 들였다.

“기호지방에서 감화시키기 어려운 자로 말하면 바로 이존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을 그가 잡았기 때문에 “분명 천주교를 확실히 버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약용이 용양위 부사직(종5품)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 왔다. 즉, 조선의 양반 초기 천주교 신자이면서 권일신과 학자로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정약용이 이미 알고 지내던 동기 이존창을 체포한 것이며, 그것으로 일신의 안위로 삼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약용은 굳이 그것을 들먹여 한양의 주류세력으로 돌아가는데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의 뜻과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이존창을 팔아 정약용이 살아남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존창 또한 감옥에 있으면서 편한 생활을 한동안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약용이 금정 찰방으로 재임 당시 홍주목사는 유의(柳誼)였다. 유의는 영조 10년(1734)에 태어나 영조 45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정조 2년(1778년)에 정언, 지평 등을 거쳐 홍문관에 들어갔다.

홍주목사로 있을 때 금정에 와 있던 정약용과 왕래가 있었는데, 그의 됨됨이에 반해 「목민심서」에 청빈한 목민관이라 일컬었다. 유의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찢어진 갓과 성근 도포에 찌든 색깔의 띠를 두르고 조랑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부자리는 남루하고 요나 베개도 없었다 하니 저절로 위엄이 서고 형벌을 내리지 않아도 고을이 다스려졌다고 한다.

그는 또한 사소한 청탁을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정약용이 “나라의 일에 있어 단 하나의 어그러짐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융통성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임금께서 나를 홍주의 목민관으로 임명하신 뜻은, 홍주의 백성을 나에게 맡겨 그들을 구휼하고 비호하도록 하신 것이네. 만일 내가 편파적으로 한 사람만 찾아보고 특혜를 준다면 이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명령을 받드는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번은 정약용이 편지를 올려 공무를 의논했으나 답이 오지 않자 후에 홍주에 가게 되어 유의에게 “어찌하여 답장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나는 홍주의 목사로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편지를 뜯어 본 적이 없네”라고 답하면서 하나도 재봉되지 않은 많은 편지들을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가져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이러한 편지야 물론 뜯어보지 않는다지만 저의 편지는 공무와 관계된 것인데 어찌 뜯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공문을 보내면 될 것이지, 왜 사사로이 편지로 보낸단 말이오”
“그 일이 비밀에 속한 것이기에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한 것입니다”
그러자 유의가 정약용을 나무라면서,
“그렇다면 비밀히 공문으로 보내면 될 것이 아닌가?”

현재 유의의 선정비는 홍주성 역사관으로 이전되어 관리되고 있다. 금정역(金井驛)은 원래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다. 백제 의자왕에게 올렸다는 우물이 있었고 근처에 사금이 났다고 해서 금정(金井)이라 부르고, 현재까지 동네 사람들의 식수와 농사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금정리의 우물은 마을회관 뒤 여느 집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나 관리와 보존이 절실하다. 마을회관 화장실 옆 ‘금정리 우물’에 대한 표지판만 덩그마니 있어 좀 떨어져 있는 우물까지는 물어서 가야 할 형편이다.

‘금정역’은 1756년 영조 32년에 화성면 용당리에 있는 용곡역과 금정역을 합치면서 위치는 용당리로, 이름은 금정역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금정역의 관할구역은 예산 대흥의 광시역, 홍성 결성의 해문역, 보령의 청연역, 홍주의 세천역, 해미의 몽웅역, 태안의 하천역, 서산의 풍전역이 있으며, 금정역은 그 중앙역이다. 금정찰방이 있었던 자리는 정확히 찾을 수 없으나 용당리 큰 동네 마을 입구에 찰방비가 여럿 세워져 있어 찰방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홍성에서 자동차로 장곡의 끝을 지나 화성면까지 30분이면 충분하다. “큰 동네”는 예전부터 불러 오던 마을 이름으로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법 큰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당시를 추측하게 한다. 차로 여러 번 돌다가 큰 도로 옆 마을 초입 풀숲에 숨어 있는 찰방 비를 발견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마을 안쪽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오가는 차들의 먼지와 매연, 산에서 뻗어온 칡덩굴과 잡풀에 섞여 있는 찰방 비는 역사 속에 묻힌 다산 정약용과 홍주의 인연을 대변하는 듯 했다. 정약용은 홍주의 금정역을 떠나 주류세계에 합류하는 듯 했으나 정조 사후, 주문모 신부의 체포와 함께 18년의 유배기를 맞게 된다. 철저하게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증거 해야 했던 다산의 생애는 어쩌면 철저하게 천주교 신자임을 끝까지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과 매 한가지처럼 보인다. 유배지에 가서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자신의 죄 없음을(천주교를 버린 것)을 증거 하기 위해 글을 써야 했던 삶은 처절하게 고독했을 것이다. 그의 심정을 소설가 한승원은 이렇게 헤아렸다.

“이후 나라에서 금할 뿐만 아니라 천주교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천주학을 버렸고 정학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얼마쯤 뒤 선생은 주자학을 비판했다. 그 비판의 밑바탕에는 천주학이 깔려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선생의 사상과 철학 속에는 주자학과 천주학이 공존공생하고 있다. 선생은 주자학을 비판하긴 하지만 외면하지 않고, 천주학을 버렸다고 했지만 그 요체를 가슴에 새겨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정약용(요한)은 죽으면서 사제로부터 고백성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홍주성을 출발해 조응식 가옥에 잠깐 들러 마음을 가라앉히고 청양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 줄무덤을 거쳐, 최경환(프란치스코) 생가 터를 지나 용당리 금정 찰방 비를 보고 근처 구재리에 있는 채제공 영정이 보관된 상의사를 오르면 하루가 지난다. 현재의 관할구역만 생각하여 홍성군을 벗어나 있는 사적지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홍성군의 관광안내가 앞으로는 홍성군과 인접한 인근의 시·군까지 연계된 시스템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