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에 홍주사람들이 득실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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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에 홍주사람들이 득실거리다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09.2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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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9>

홍주천주교회사5

 

 

 

 

 


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 성지길 296번지를 갔다. 홍주 사람 김귀동이 죽게 된 원인이 궁금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조선은 새 임금을 섬기게 되었다. 어린 순조.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의 섭정 원인 제공자다. 정조 시절 오빠 김구주의 귀양과 죽음을 되갚아 주겠다는 정순 왕후의 욕망이 극에 달한 1799년 말, 천주교를 묵인하던 남인 영수 채제공이 80세의 나이로 죽고 우연인지 정조가 젊은 나이로 이듬해 사망하게 된다. 국상이 끝나고 1800년 7월 4일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17일 최필공과 최필제를 잡아들이고 이듬해 신유년 대 박해가 진행되는데, 홍주 땅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1797년에 공주에 주재하던 충청감사 한용화는 모든 관장들에게 천주교를 소멸시키고 천주교인들을 붙잡아들이라는 사사로운 감정에서 출발한 명령을 내려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원시보(야고보)가 잡혔고 박취득(라우렌시오)도 잡혀 투옥생활을 하다가 박취득(라우렌시오)은 1799년 음력 2월 29일 순교하게 된다.

 

 

 

 

 

 

 


이미 홍주 지방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처럼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게 되는데, 김귀동은 이때 재산을 모두 정리해 충북 제천 배론으로 옮겼다. 제천의 흙과 나무가 좋아 옹기 굽기가 좋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김한빈이 가세했다. 김한빈으로 치면 정약종 집의 행랑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김귀동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다.

둘 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지도도 받았으니 신앙 깊은 것으로 치자면 황일광(시몬)과 황심(토마스) 못지않다. 한양에서 정순왕후의 대 체포령이 떨어지자, 이미 끝이 났던 1795년의 정약용 사건이 또 붉어졌다. 관련자 모두가 다시 불려갔다. 그리고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것은 유배형을 받은 정약용과 약전뿐이었다. 조선은 거대한 내전을 겪는 꼴로 온전한 곳이 없었다. 즉, 숨을 데가 없었다.

그동안 숨어 지내며 성무를 집행해오던 주문모 신부가 잡혀 처형되었고, 그를 피신시키기 위해 대신 신부 노릇을 한 최인길도 처형되었다. 물론 강완숙도 같은 처지였고 양반가의 천주교 신자들 또한 남은 자가 없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처형된 사람들로 가득했고 이존창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처형당했다. 숨기를 갈망하여도 숨을 곳이 없었다. 전주 지방도 유항검과 그의 아들, 이순이(루갈다) 등이 참수됐다.

유항검이 처형된지 11일 뒤, 9월 29일 황사영(알렉산델)이 배론 옹기굴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 약현의 사위인데 17세에 진사가 된 수재였다. 박해를 피해 숨은 곳이 김귀동과 김한빈의 손길이 있는 배론 옹기 굴이었던 것이다. 옹기를 구워 저장하던 장소인 자그마한 토굴은 사람 1명이 숨기에 적당했다.

이곳에서 황사영은 그동안 있었던 조선의 박해 상황과 앞으로를 위한 방법론적인 입장에서 다른 나라의 힘을 빌어 조선의 신앙 자유를 얻기를 청원하는 내용인 1만3311자에 달하는 장문의 ‘황사영 백서’를 쓰기에 이른다. 북경 대주교를 향한 이 백서가 전달되지도 못하고 발각되어 황심과 김한빈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1801년 11월 5일에는 황사영이 순교하였다.

신유 대 박해는 옥중에 있던 모든 이가 그해 말까지 완전히 처형되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황사영을 숨겨 주었던 김귀동도 붙잡혀 홍주로 와 순교하였다. 지금 다시 배론을 올라가면 그렇게 높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포졸에게 눈에 띨 만큼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산이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다. 조선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조성한 신학교 터를 돌면 옹기 굴이 바로 나온다.

옹기를 만들어 구워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간 김귀동이 금방 나올 것 같다. 반갑게 김한빈도 걸어 나와 홍주에서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물 한잔 권할 것도 같다. 두 양반 모두 교회사 안에서 거목도 아니다. 희대의 ‘나라 팔아먹을’ 사건을 시도한 황사영에게 가려져 겨우 순교록에 이름이 올려진 평범한 신자들이다. 그러나 그 곳에 홍주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홍주에서 어려운 삶을 살았던 평범했던 사람들이 ‘흙과 나무가 좋다’는 말만 듣고 걸어서 찾아 간 제천 배론땅, 흙을 빚어 항아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가마 불을 지폈다. 식구들을 내려놓고 지게에 옹기를 묶어 매고 재를 수도 없이 넘어 장마당을 찾았다. 먹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옹기를 등에 지고 오기도 했지만, 장마당에 오면 고향의 소식을 전해 듣거나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의 소식도 주워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천주교 신자는 눈빛을 보면 알았다. 항아리를 사러 온 사람의 눈과 신자들의 눈빛이 달랐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해 포졸들은 신자인척 꾸며 줄줄이 잡아가기도 했다. 목숨을 내놓고 십자 성호를 긋거나 신자임을 알렸을 때 오갈 데 없던 사람들은 옹기장이들의 뒤를 졸졸 따라 갔다. 홍주 땅에서 도망 나와 배론 김귀동을 찾아 간 수많은 홍주인들이 배론 넓은 교우촌에 터를 일구며 살기 시작했다. 끼니를 잇지 못하고 맨 몸으로 찾아 온 손님, ‘혹시 밀고자가 아닐까?’ 조마조마했지만 아침이면 새 손님 방문 앞에는 어김없이 항아리 몇 개가 있었다. 장사 밑천이었다. 없는 가운데 가진 것을 내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공동체가 배론의 공소가 되었고, 고개 너머 ‘용수막’ 공동체를 만들어 ‘용수막 공소’가 되었다. 배론 교우촌은 병인박해가 끝날 때쯤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고, 신자들이 지하교회를 이루어 살면서 명맥을 이어오다 용수막 공동체로 남은 이들이 고해성사 보러 다니게 되면서 용수막 성당이 활성화되게 기여했다.

용수막은 140년 전에 신자들의 손에 의해 지어졌는데, 근처 배론의 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벽돌 하나하나를 구워 만들어 성당 건물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용수막은 외관을 그대로 두고 내부를 고치면서 제2의 삶을 펼치기 위해 마무리 작업을 하는 중이다.

홍주의 김귀동은 배론으로 갔다가 황사영을 숨겨 주었고, 그 또한 잡혀 처형되기 까지 적혀 지지 않은 수많은 신앙 활동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홍주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든 수 많은 또 다른 김귀동들이 제천의 배론에서, 그리고 조선의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들 중 누구도 부모나 자식을 죽인 조선 정부를 향해서 원한을 품고 칼날을 세운 자는 없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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