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를 배반한 자, 그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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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를 배반한 자, 그들의 고통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10.1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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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11>

 

 

 

홍주성역사관에 있는 천주교 박해 현장을 재현한 조형물.

홍주천주교회사7

1801년에 휘몰아쳤던 대 박해는 천주교 신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열심한 신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정신을 잃거나 어제의 고문 기억이 날마다 배가되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천주를 모른다’거나, ‘다시는 믿지 않겠다’ 또는 밀고자가 되는 신자 또한 늘게 되었다. 배교자 최해두는 ‘자책’이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입교하여 근 20년이나 죽기로써 봉사하노라 하였다. 시절이 불행하여 성교회에 대한 박해가 크게 일어나니, 평일에 열심 봉사하여 그 믿음을 크게 이룬 이는 모두 우리 주 예수의 가르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교의 큰 은혜를 받았지만, 나같이 아무런 공도 믿음도 없이 죄에 가득 찬 인생은 지난 신유년에 천주께서 내리신 순교치명의 큰 은혜에 참례치 못하고, 나 혼자 빠져 나와 이 흥해의 옥중에서 욕된 목숨이 붙어 있으니 이 어찌 절박하고 원통한 일이 아닌고!’ 하면서 옥중에서 육신을 보존하고 앉아 있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간절한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

옥리들이 자신을 가리켜 ‘사학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죄스럽게 생각한 배교자의 눈물이다.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의 배관겸(프란치스코)은 교회 창설 후 복음을 받아들이고 1791년 신해 박해 때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바로 후회하고 열심 수계하면서 서산으로 이주했다가 면천 양제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꾸준히 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 사제를 모시고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경당을 마련할 정도로 열심히 하였는데, 조화진의 밀고로 홍주로 압송되었다.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라는 강요에 굴복당하지 않고 청주로 이송되어 1799년 12월 13일 매질로 순교한다. 또한 그의 동생인 배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 이후로 조선에 성직자가 없음을 한탄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에 힘을 썼는데, 1801년 체포되어 4~5개월 동안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믿음이 굳건하자 관장이 가족과 신자 몇 명을 이용하여 회유하게 되었는데, 인간적인 본성에 굴복하여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홍주옥의 문지방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즉시 옥으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 마리아를 찬미하였다.

이에 관장이 “네놈, 미쳤느냐? 방금 전에 모두 배반하지 않았느냐?” 하니, “예, 제가 그런 말을 하다니 미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른 정신이 돌아와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소리 높여 증거 합니다” 고 말함으로써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홍주읍성 안에 위치한 홍주감옥.

한편,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배울 출신 이여삼은 1790년에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미신에 젖어 있던 그는 부분적으로만 교리를 실천했었는데 1791년 홍주에서 잡혀 배교를 하고 말았다. 1798년에 맏형 이무명과 함께 전라도 땅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801년 맏형은 체포되어 유배당해 3~4년 후 사망하였고 이여삼은 1802년 두 번째 체포된다. 

수감 7개월 후 유배형에 처했다가 몇 년 후 풀려나 진산 고을에 살다가 1812년 음력 6월경 홍주 관장에게 다시 인도되었다. 이것이 세 번째 체포였는데, 이때 이여삼의 신앙은 확고했으며 용기가 있었다.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받아도 지나간 ‘배교’의 잘못을 더 이상 거듭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는 삼모장을 내리치는 형리들을 탄복시키고도 남았다.

“네 이놈, 윽 소리라도 내면 배교한 것으로 알겠다”는 형리들의 협박 속에서 당당하던 이여삼은 죽기 바로 전, 형리들에게 물 한잔을 청했는데, 옥졸들은 “저 놈이 죽기 전에 물이라도 마시려나보다”며 건네주자 자신의 이마에 맑은 물을 붓고 “나 이여삼이 이여삼 바오로에게 세례를 준다”하고 자신이 자기에게 세례를 줬다.

천주교 교리 상, 하느님 때문에 순교할 경우 ‘혈세’라는 세례로 받아짐에도 불구하고, 입교한지 20여 년 동안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고자하던 간절한 열망을 채우지 못하고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이 되자 이러한 예식을 치렀던 것이다. 그가 죽자 홍주 옥을 지나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구름 모양 기둥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생겼고 이여삼의 시신은 어떠한 상처의 흔적도 없이 깨끗해졌다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형리들은 그의 행실을 증거 하기 시작했는데 신자가 끌려오면 우선 곤장을 쳐보고 “이 놈은 이여삼만 못하다”라고 하면서 그의 행적을 전하곤 했다.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한 번 천주를 모른다 했던 자신의 실수를 결국은 순교로 기워 갚은 이여삼의 일들은 수많은 천주교 예비신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전국의 예비자 교육 장소로 ‘홍성 홍주 성지’가 손꼽히게 만들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이여삼의 조카 이승화(베드로)의 가슴 아픈 배교 내용도 있다. 아버지 이무명과 형의 유배형을 보면서도 일신의 약함으로 배교의 선택을 한 이승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 역시 체포되어 두 집안에는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게 되었다. 한편 나는 오직 먹을 것만 생각했고 나의 온 바람은 목숨을 보존하는 데에만 쏠렸다.

두 달 후 조정에서 답변이 도착하자 우리는 저마다 다리에 한 차례 매를 맞았고 그리고 나서 우리는 열흘 후에 다시 불려나가 고문을 어느 정도 당했으며 영장은 나를 석방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앞으로 또 그러겠느냐?” 이 말을 두세 번 되풀이하여 묻는데 고통으로 인하여 온통 정신이 없던 나는 간신히 이성을 찾고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나왔다.

나는 너무나 감동하였고,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옷을 적셨다. 오호 통재라! 나는 나의 죄도 생각하지 않았고 구세주의 수난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영벌도 생각하지 않았고 나와 함께 풀려나지 못한 부친을 뵈올 때 송구스러울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체면도 없이 한동안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의 석방을 축하해주느라 저녁에 진수성찬이 나왔는데, 예전에 오직 먹을 것만 생각했던 내가 단 한 숟갈도 삼킬 수가 없었다’ 누가 이들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누가 감히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다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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