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사 기웃거리던 소년이 전기공사전문기업 대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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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사 기웃거리던 소년이 전기공사전문기업 대표로
  • 김현선 기자
  • 승인 2014.10.3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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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승이엔씨 김주완(63) 대표.
“어린 시절, 할머니 따라 나섰던 광천장과 결성장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은하면 학산리 내남마을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주)거승이엔씨 김주완(63) 대표이사는 장날이면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고 기억했다. 할머니가 키우신 작물을 가지고 어른들을 따라 쏘다니던 광천장과 결성장이 그의 생활권이었다.

그때 전파사 앞을 기웃거리던 소년은 전기공사와 소방시설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의 대표가 됐다. 4~5살, 거의 60여년이 지난 그 당시의 모습이 그는 아직도 생생하단다. “내남부락 꼭대기집에 살았어요.

할아버지가 인성이 좋으셔서 당시 마을 분들을 데려다가 밥을 자주 해주셨죠. 고모가 그때 ‘식구들 먹을 것도 없는데 이웃사람부터 챙긴다’고 하던 게 생각나네요” 없는 형편에도 이웃들까지 챙겼던 할아버지는 그
가 9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도 그가 더 어렸을적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작은 아버지는 군대에 있어 휴가도 못 나오던 시절, 외아들인 그는 남자 어른들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당시는 물을 길어다

먹던 시절이었어요. 국민학생때부터 물을 지러 다녔습니다. 동네 부역을 하러 나가기도 했어요. 광천과 결성을 잇는 신작로를 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마을마다 구역을 나눠서 신작로를 내고 관리했습니다.

한달에 한 번씩 그 순번이 돌아왔는데, 어른이 없으니 제가 학교 빠지고 부역에 나갔죠” 국민학교 졸업 후 그가 선택한 길은 중학교 진학이 아니었다. 집안이 어려워 학교갈 형편이 안됐던 당시 1966년, 그는 교

문이 아닌 서울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그가 자리잡은 곳은 종로였다. “제 꿈은 전파사를 하는 거였어요. 광천장에 가면 전파사, 소리사 앞을 기웃거렸었죠” 처음 서울에 올라와 안 해본 일

이 없다는 그는 17살이던 68년부터는 종로 YMCA옆 지금은 사라진 ‘한국TV학원’에 다녔다. 낮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 다닌,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생활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

다. 전파사 일이 영어도 알아야 했고, 지식이 없으면 못 하겠더라고요” 공부를 마치고 그는 세운상가에 있는 전파사에 취직했다. “쫄병으로 들어갔죠. 스무살도 안 된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니, 저보다 나이많은 분

들과도 친구로 사귀고 지냈습니다” 그는 1971년 서교동으로 옮겨와 작은 점포를 얻어 전파사를 차렸다.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일이었지만 현실은 따라주지 않았다. 전파사 일이 사양길에 들어서던 때였다.

“75~6년도부터는 건축하고 집짓는 곳에 전기공사도 함께 하게 됐습니다. 이후 80년대에는 전기공사를 전문으로 하게 됐고요” 전기공사를 전문으로 하면서, 87년에는 한국전력공사 협력업체로 선정돼 지금까지

도 한전 협력업체로 함께하고 있다. 한전 협력업체로 쌓은 노하우는 큰 사업을 수주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지난 2007년 태양산업이 천안에 제 2공장을 설립할 당시 전기공사에만 30억이 들어가는 공사를 수주

했고, 지난 2010년에는 세종시에 들어서는 아파트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작은 점포에서 시작한 그의 회사는 전문적인 인력과 적격 전기업체에 상당하는 장비 보유까지, 작은 가정 전기 시설에서부터 한국전

력공사 협력업체로 대형 전기공사·소방공사·철도관련공사·통신공사 시공까지 아우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구청장 표창에서부터, 서울시장표창, 산업자원부장관표창, 지식경제부장관 표창까지, 쌓아온 기술력

만큼이나 전기산업진흥에 이바지 한 공로로 받은 표창도 여럿이다. 전국 1만 4000여개에 이르는 관련 업체 가운데,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은 기술력이라고 그는 말한다. 숙련된 전문 인력이 거승이엔씨

의 자산이다. “우리 회사 직원들은 최하 10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공사라는 게 힘든 일이지만 오랜기간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대표라고 해서 느즈막히 회사에 출근하는 법이 없다.

“매일같이 8시 전에 회사에 출근합니다. 직원들 얼굴 한 번 더 보려구요. 직원들이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기 때문에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려면 제가 좀 더 일찍 나와야 합니다” 그의 경영 철학은 ‘주인의식’을 가

지고 일한다는 것이다. 직원들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바이다. “자기 일에만 몰두하면 안되요. 다른 직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살피며 업무 전반을 파악하고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도 강

 

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해보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거침없이 도전하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한다면 못 할 일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항상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그는 한국전기공사협회 등 업계 일에도

열심이다. 전기신문사 이사로, 전기공사공제조합 장학재단 이사로 일한 그다. 이번엔 한국전기공사협회 회장 선거를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위원으로 지난 1일 위촉됐다. “현재 회장선거는 대의원 간선

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점이 많이 제기됐습니다. 현행 선거제도가 시간적, 경제적 낭비가 많을 뿐 아니라 회원 간 반목과 대립을 조장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만큼 직선제로의 선거제도 개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늘 고향을 가슴에 품고 사는 그는 재경홍성군민회 모임에 참석해 고향 사람들을 만나며 향수를 달래고 있다.

 

 

 

 

지난 14일 뉴코리아CC에 모인 재경홍성군민회 골프모임 '홍성회'.

현재는 재경홍성군민회 골프모임 ‘홍성회’에서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골프채를 처음 잡게 된 것은 지난 1995년부터다.

“주변의 권유로 처음 시작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좀 꺼려했지만 지금은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할 겸 취미생활로 하고 있습니다”

취미생활이라지만 그의 실력은 상당하다. 지난 12일 뉴코리아컨트리클럽에서 열린 대회에서 그는 시니어챔피언에 올랐다. 뉴코리아 컨트리클럽에서는 매년 주니어챔피언과 시니어챔피언을 선발하고 있다.

이제는 골프장에 가면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단다. “어렸을 적 기계체조를 했는데, 그 운동신경이 여전히 남아있나봅니다. 하하”

어린시절을 은하면에서 보낸 기억은 그에게 자부심이 되어 남아있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자랐다는 데 자부심이 있습니다. 콘크리트가 아닌 꽃과 나무가 살아있는 자연 속에는 도시인들은 느끼지 못할 감성과 추억이 있으니까요. 도시 사람들은 아마 잘 모를 겁니다”

그가 나고 자란 은하면 학산리 내남마을에는 그가 세운 마을 표지석이 있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경로당에는 노래방기계를 설치해드리기도 했다. “제가 자란 마을에, 고향에 도움이 되고, 어르신들이 즐거워할만한 일이라면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나고자란 고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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