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시 순교자 홍주 115명, 덕산 8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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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시 순교자 홍주 115명, 덕산 89명
  • 정리·사진 김경미
  • 승인 2014.11.0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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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천주교우촌,사제 30명·수녀 50명 배출

합덕성당은 내포지역의 첫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체 본당이다. 1890년 예산군 고덕면의 양촌성당을 1889년 초대 본당 퀴를리에 신부가 지금의 자리에 한옥성당으로 지은 이래 124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성당은 1929년 제7대 페랭(한국명 백문필) 신부가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로 완공했다. 양관(洋館)으로 불렸던 이 성당은 종탑이 쌍탑으로 지어진 게 특징이다.(위)는 성당 내부

충청도 내포지방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다. 당진의 합덕본당은 바로 이 내포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00년을 넘어선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천주교 박해는 1791년 이후부터 1879년까지 88년간 7회에 걸쳐 발생했다.

수차에 걸친 박해로 순교한 내포지역 출신 신자는 남성 331명, 여성 103명으로 총 434명에 달한다. 이는 전국 순교자의 25%를 상회하는 숫자이다. 시기별로 보면, 신유박해(1801)시 24명, 을해박해 때 13명, 기해(1839)·병오박해(1846)때 25명, 병인박해(1866)때 356명으로 병인박해 시기가 가장 희생이 컸다.

군현별로 보면, 신유박해 때는 덕산이 10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른 이들은 면천, 홍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기해박해 때에는 순교자의 범위가 홍주, 신창, 대흥, 서산, 보령, 서천 등지로 확산되었다. 병인박해 때에는 태안군을 제외한 내포지역의 모든 군현에서 순교자가 나왔는데, 홍주가 115명, 덕산이 89명으로 가장 많았다. 박해시기 신자들은 안전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철저히 교우촌 내부 혹은 교우촌 간, 신자 집단 내의 통혼을 하였다.

1850년대에 이르러 천주교 박해가 일시 중단되자 전국의 신자 수는 크게 늘어 1861년 1만8000여명 정도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1849년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와 프랑스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활약했다. 내포에서는 다불뤼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들이 선교를 수행하였다.

1861년 베르뉘 주교가 조선 교구를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두 구역이 내포지역에 있었다. 오페르트 사건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무려 13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프랑스 신부들이 모두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되었다. 또 내포지역 100여개 마을에서 37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때 순교한 신자들은 읍성 안팎에 살던 이들, 삽교천 유역의 여러 포구에 살던 이들, 그리고 산간지역의 교우촌에 살던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료적 근거는 1861년 조선교구장으로 부임한 베르뉘 주교가 조선교구를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눌 때, 홍주 이북을 상부내포, 홍주 이남과 태안반도 일대를 하부내포라 부른 데에서 연유한다고 한다고 서술한 최영준의 ‘19세기 내포지방의 천주교 확산’과 김수태의 ‘조선후기 내포지역의 천주교 확산’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이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은 1886년 이후 천주교측은 내포지역을 중시하여 공소와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더 많은 공소를 만들어 1900년까지 100여개에 달하는 공소를 만들었다. 덕산과 면천을 중심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공소는 병인박해 시 상당수가 가야산과 차령산맥으로 이전하였다가 이제 내포평야 지대로 다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서산, 해미, 온양, 아산 일대에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또 천수만 일대, 비인, 서천, 홍산 등지로도 확산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89년 덕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 본당이 세워진 것과, 예산 간양리에 간양골 본당이 세워진 일이다. 간양골본당은 양촌본당으로 통합되었다.

1895년에는 아산 공세리에 본당이 설립되었고, 1898년에는 양촌본당이 폐쇄되면서 합덕본당이 신설되었다. 페랭 신부 재임 시인 1926년 예산본당, 1935년 서산본당, 1938년 당진본당이 각각 분리 신설됐고, 1961년 제8대 박노열 신부 때 신합덕본당이 분리됨에 따라 합덕본당은 구합덕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97년 다시 본래의 이름인 합덕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제 내포지역의 천주교는 합덕본당과 공세리본당이 주도하게 되었다. 합덕성당 김성태 주임신부는 “이즈음 뮈텔주교는 합덕 일대에서 농지를 사들이기 시작한다.

이는 1930년대 200정보에 가까운 토지소유로 이어지는데, 이는 가난한 신자들을 모아 교우촌을 만들고 그들에게 소작을 주어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게 하면서, 교회 역시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합덕성당이 있는 합덕리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천주교우촌으로서 30명이 넘는 사제와 50명이 넘는 수녀를 배출한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지역은 박해시대 때부터 부모 잃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익숙해 1969년까지 합덕성당에서는 고아원을 운영했다”며 “근대적 형태의 고아원의 효시”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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