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신선을 기다리며 그리워하지 않으리 : 香爐庵卽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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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신선을 기다리며 그리워하지 않으리 : 香爐庵卽事
  • 장희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4.11.0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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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구 박사의 번안시조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41>

香爐庵卽事(향로암즉사) 

스님 떠난 산은 멀고 백로 나는 들물 맑아
나무그늘 서늘하니 번지는 피리 소리
다시는 신선 기다리며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僧去秋山逈 鷺飛野水明
승거추산형 로비야수명
樹凉一笛散 不復夢三淸
수량일적산 불부몽삼청

한자어를 보면 그 뜻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운 말을 빌어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렇다. 향나무 가루를 뿌리면 은은한 향내음이 난다. 그래서 향로(香爐)라고 했고, 분향(焚香)한다고도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향을 피운다.

향냄새 나는 화로가 향로이기 때문이다. 향로암에 올랐더니 향을 피운 것처럼 코를 자극하는 구수한 향내음이 진동했음을 느끼게 된다. 시인은 나무 그늘 서늘하니 번지는 피리 소리이니, 다시는 신선 기다리며 그리워하지는 안 하리라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다시는 신선을 기다리며 그리워하지 않으리(香爐庵卽事)로 번안해본 오언절구다.

작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스님이 떠나가니 가을 산은 더 멀고 / 백로가 나는 곳 자리 들물은 맑구나 // 나무 그늘 서늘하니 번지는 피리 소리이니 / 다시는 신선 기다리며 그리워하지는 안 하리라]라는 시상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스님 떠난 가을산 멀고 백로 나간 들물 맑네, 번져난 피리 소리 신선을 기다리지 않으리’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향로암에서 짓다]로 번역된다. 최근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 향로암을 새로 지은 것으로 알려지지만, 향로봉은 순천 선암사에 있는 암자다.

시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시인은 향로봉을 찾은 즉시 시 한 수를 읊지 않을 수 없던 것 같다. 그래서 정경을 보고 난 즉시 와 닿는 시상에 따라 읊었던 시를 흔히 즉사(卽事)라 했다. 卽事치고는 대구법이며, 비유법의 수법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 작품이다. 시인은 스님이 떠나가니 가을 산은 점점 멀어지고 백로가 들에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곳의 들물은 맑기도 했다는 시상을 일으키고 있다.

이 기구와 승구에서도 [僧去와 鷺飛, 秋山과 野水, 逈과 明]이란 대구법이며, ‘가을 산이 멀다. 들이 물이 맑다’라는 비유법을 거침없이 썼다. 백로가 날아 움직인 자리에는 분명 발자국이 남았겠지만, 물이 오염되지 않아 맑기 때문에 백로가 찾아 들었다는 시상이겠다.

전구와 결구로 이어지는 화자의 시상은 멋을 부린다. 나무 그늘이 서늘한데 번지는 피리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때마다 혹시나 하면서 신선을 생각했던지 [다시는 신선을 그리워 안 하리라]라 다짐해본다. 나무가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와 백로가 퍼덕거리며 나는 소리를 신선의 소리와 그 모습으로 상상했을 것이란 추측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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