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가을 숲 헤치면서 달은 돋는구나 : 香爐庵夜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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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가을 숲 헤치면서 달은 돋는구나 : 香爐庵夜唫
  • 장희구<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4.11.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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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구 박사의 번안시조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42>

香爐庵夜唫(향로암야금) 

남국 국화 피지 않고 눈에 삼삼 강호여라
기러기 나는 산속 사람들 갇혔는데
끝없는 가을 숲 헤치며 돋아 오른 저 달님.

南國黃花早未開 江湖薄夢入樓臺
남국황화조미개 강호박몽입누대
雁影山河人似楚 無邊秋樹月初來
안영산하인사초 무변추수월초래

 

 

 

 

 


따뜻한 남쪽 지방을 찾았을 때는 시절이 아직 일러 국화도 피지 않은 이른 가을이었다. 향로암을 찾아 즉석에서 한 움큼의 시심을 쏟아 붓던 시인의 시상은 밤의 풍경을 보고 그냥 잠을 청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눈앞에 펼쳐지는 야경의 포근함을 시상 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아 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자신이 산의 적적함을 기러기 나는 산 속에 갇혀있음으로 상상하며 멀고 너른 강호에 취한다. 시인은 기러기 나는 산속엔 사람이 갇혔는데, 끝없는 가을 숲 헤치면서 달은 돋는구나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끝없는 가을 숲 헤치면서 달은 돋는구나(香爐庵夜唫)로 번안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남국에 시절 일러 국화는 아직은 벌리지 않고 / 꿈이런 듯 먼 강호(江湖)엔 누대가 들어오네 // 기러기 나는 산속엔 사람이 갇혔는데 / 끝없는 가을 숲 헤치면서 달은 돋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국화는 벌리지 않고 강호엔 누대가 드네, 산속엔 사람 갇혔고 가을 숲에 달이 솟네’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향로암 야경을 읊어가며]로 번역된다. 향로암즉사(香爐庵卽事)에 한껏 취했던 시인은 향로암 야경을 보고 그냥 두지 못했던 모양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강호를 보면서 어렸을 적의 고향 저수지의 언덕에서 뛰어놀던 그 때 그 시절도 상상했을 것이고, 저 멀리 우거진 가을 숲을 헤치고 불쑥 솟아오르는 달을 보면서 그냥 내버려 두지는 못을 것이다. 위와 같은 시심에 벅찬 시인은 남쪽 선암사에 와서 시절이 일러 누런 국화는 입을 벌리지 않지만 꿈속이란 듯이 먼 강호(江湖)의 추억만이 눈에 삼삼하다는 시상을 떠올리게 된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칠 양으로 향로봉의 야경은 고향의 한 무더기를 이곳에 옮겨놓은 듯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란 추측은 가능하다. 문학은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이 시를 읽으면서 새로워지는 것은 시 인이 아니라도 충분하리라. 화자의 상상력은 늪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만다.

기러기 나는 산속엔 아직도 산을 빠져 나가지 못한 사람이 갇혀 있는데, 저 멀리 [끝없는 가을 숲 헤치면서 달은 돋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산이 좋아 산속의 정경에 취해 있는 사람을 두고, ‘갇혀 있다’고 하거나, ‘가을 숲을 헤치고 달이 솟는다’라는 표현은 비유법의 달인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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