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 26세의 짧은 생 영혼으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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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26세의 짧은 생 영혼으로 남아
  • 취재·한관우/사진 ·김경미
  • 승인 2014.11.1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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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16>

경기 안성 미리내성지

‘모태신앙’ 김대건 신부 잠든 곳 
 숭고한 신앙 품은 ‘영성 귀의처’

 

 

 

 

 

미리내성지 한국순교자 79위 시복 경당 앞에는(사진 왼쪽부터) 본당 초대주임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조선교구 3대교구장 고주교 신부, 본당 3대주임 최문식 신부의 묘소가 나란히 함께 하고 있다.

천주교의 솔뫼성지(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5)는 김대건(1822∼1846) 신부가 출생한 곳이고, 미리내성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는 김 신부가 군문효수(軍門梟首;고종 31년(1894) 갑오개혁 때 폐지되기는 했지만, 대역죄를 범한 죄인의 목을 벤 후 긴 장대에 묶어 매달아 군중을 경계시켰던 사형법)를 당해 절명한 후 묻혀 있는 곳이다.

‘소나무 산’이라는 솔뫼에는 200년이 넘는 재래 적송들이 상큼한 솔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은하수 골짜기’란 뜻의 미리내는 계곡이 무척 아름답다. 두 곳 모두 곱디고운 우리말 땅이름이다. 김대건 신부(세례명 안드레아)의 증조부(진후·1814년), 종조부(한현·1816년), 부친(제준·1839년)은 천주교를 믿는다고 차례로 처형당했다.

아흔아홉 칸의 대갓집에 살던 김해 김씨 가문이 몰락하여 폐문지경에 이르렀고 정든 고향에 머물 수조차 없게 됐다. 김대건은 일곱 살 때 어머니 고씨(우르술라)를 따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했다. 여기서 프랑스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렇다면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출현한 당진 솔뫼 생가터와 이곳 미리내는 어떤 자리일까. 22년 동안 4명의 고귀한 목숨이 희생됐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가족사임에 분명하다. 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는 은하수가 흐른다.

그것은 현세의 은하수가 아니라 영원히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피우는 불빛으로 이루어진 미리내다. 미리내 성지는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 모진 탄압을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며 살았던 곳이다.

그때 그들이 피워낸 삶의 불빛들은 은하수처럼 슬프고도 아름답게 흘렀고, 그 불빛은 지금도 세상의 길을 밝히는 구원의 빛으로 흐르고 있다. 더구나 거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넋과 그 어머니의 넋이 성모의 넋이 되어 미리내 건너에 나란히 누워 있는 곳이다.

26세에 생을 마친 김대건 신부의 일생은 짧았으나 그가 남긴 자취는 영혼으로 영원하다. 정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문명에 정진하기를 10개성상,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한국 천주교의 개벽을 알린 성인으로 자리매김 했다.

 

 

 

 

 

 

 

1928년에 세워진 경당 모습. 앞에는 김대건 신부 등의 묘가 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추호의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는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그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하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알베르토 주임신부는 “이곳에는 충청도당진 출신의 김 신부가 안성에 묻히는 과정에는 피맺힌 사연이 포개져 있다.

당시에는 국사범으로 처형당한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그 주검을 연고자가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의 경우 장례마저 가로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도들은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었으니, 그중 이민식(빈첸시오·1829~1921)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절명한 지 40일째 되던 날 밤 김 신부의 주검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50리 되는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 만에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유언대로 김 신부의 곁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마저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 집 저 집 문전걸식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그녀도 아들 곁에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92세까지 장수의 생을 마감한 후 그 곁에 묻혔다.

결국 김대건 신부의 묘역에는 본인이 김대건 신부 곁에 묻히기를 원한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고(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 마르코 (세 번째 방인사제 중 한 분) 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 하고 있다.

바로 경배와 기도를 드리는 작은 성당인 ‘한국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다. 1928년 세워진 경당 앞에 대리석으로 조영된 김대건 신부 묘 가슴 부위에는 손때가 새카맣게 묻어 있다. 이곳을 찾는 교우나 순례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위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알베르토 신부의 설명이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되었는데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2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을 비롯해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이 들어섰다.

1980년에는 김 신부의 묘소가 있는 경당 옆에 9만9000㎡(3만평) 규모의 광장을 조성하고, 성당에서 경당에 이르는 길 가에 14처 조각을 설치하는 한편,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103위성인 기념 대성전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곳이다.

 

 

 

 

 

 

 

미리내성지 안내석.

미리내성지는 1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산이 높고 골이 깊었다고 한다. 신유박해(1801)와 기해박해(1839)를 비롯한 모진 탄압 속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어 공동체인 교우촌을 형성해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며 살았다. 깊은 밤중에 그들이 피운 불빛을 저 멀리서 바라보면 은하수처럼 보였다 해서 미리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성지 입구에서 왼편으로 숲길을 따라 걸으면 웅장한 피라미드형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 입구에는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전’이라고 적혀 있다. 이곳은 성당과 종탑의 2개의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성당은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3450㎡에 이르는 규모다. 뾰족한 피라미드형이기 때문일까. 성지와 성당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보다 딱딱하고 매서운 느낌이다. 순례자와 방문객의 시선은 자연스레 위쪽으로 집중하지만 외관과 달리 내부는 전형적인 서구식 성당의 모습이다.

이곳을 건립할 때 서울 명동성당을 모델로 건립했다고 한다. 성당의 제대에는 김대건 신부의 종아리뼈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 위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의 모습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정교하게 표현됐다.

한편 성지를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가에는 천주교인의 순교 장면과 형구(형벌을 가하거나 고문할 때 쓰는 기구)를 모형으로 볼 수 있다. 불과 140여 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특히 ‘성(聖) 유대철 베드로의 수형’에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총14차례의 형벌과 백여 대의 매, 치도곤(곤장)을 당했다.

이러한 모진 고문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하지 않자 기해년 10월 31일 형리의 손에 의해 교사(목을 맴)당했다”라는 설명은 당대 신앙생활을 짐작케 한다. 이렇듯 미리내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모태신앙과 성직자로서의 행적이 당진의 솔뫼성지와 함께 길이 빛나고 있는 곳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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