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지역 천주교의 부흥기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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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지역 천주교의 부흥기가 시작되다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10.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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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12>

 

 

 

외삼문이라고도 하며 아해건물로 안회당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조목조 건물인 홍주아문.

홍주천주교회사 8

홍주 지역의 천주교회사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를 하고 넘어가자. 1784년 한국교회가 창설되고 약 7년 후 진산 사건으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전주에서 참수되면서 한국 최초의 박해(신해)가 시작된다.

 

 

 

 

 

 

 

                                         원시장 베드로.

이 신해박해의 여파로 이곳 홍주에서 원시장(베드로)이 체포되어 이듬해 1792년 12월 17일(양 1793년 1월 28일)에 순교하여 충청도의 최초 순교자가 된다. 1780년대 당시 이미 홍주 일대(예산, 당진, 합덕, 면천, 덕산, 청양, 보령 등)에는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산 사건’이 가져온 천주교인 색출 작업이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홍주 목사는 가까운 응정리에 사는 원시보(야고보)를 잡기 위해 포졸을 보냈으나 원시보를 잡지 못하고 사촌인 원시장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한 원시장의 자진 체포로 홍주 목사는 내심 기분이 좋았으나 8개월여 동안 배교하지 않는 원시장 때문에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공주 감영에서는 ‘장살’이라는 명을 이미 내렸으나 원시장은 어쩐 일인지 죽지 않고 신앙심만 더욱 깊어졌으며 가족들을 만나도 “가족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한시라도 하느님을 모른다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방 프란치스코.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자 홍주 목사는 “저놈은 틀림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라고 외쳐대며 엄동설한 한밤중에 온 몸에 물을 뿌려 동사 시킨다. 그는 입교 후 2~3년 동안 예비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한번에 30여 가구를 입교 시키는 등 열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옥중에서 한 교우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죽기 전 “저를 위해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저도 이 얼어가는 몸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바칩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원시장(베드로)의 첫 순교를 시작으로 홍주 지역은 박해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된다. 1798년 12월 16일 면천 여름이(현 당진군 면천면 대티리) 출신 방(프란치스코)과 동료 2인이 옥중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으며 방(프란치스코)은 슬퍼하는 두 동료에게 “만약 우리가 이렇게 좋은 순간을 놓치게 된다면 이제부터 어떤 기회를 기다려야 하겠소?” 하면서 불꽃같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순교하였다.

 

 

 

 

 

 

 

                                          박취득 라우렌시오.

1798년 음력 8월에는 면천 출신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잡히게 되는데, 그는 1795년에 순교한 지황(사바)에게 교리교육을 받았으며 서울에서 영세한다.

고향 면천에서 두 번의 투옥 중 여러 번 문초를 받고 홍주로 이송되어 16번의 문초를 받는 동안 곤장과 몽둥이 등 도합 1400대의 매를 맞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게 되는데,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알려주기까지 한다.

형리들이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고, 다 죽은 듯 하다가 살아나자 형리들은 요술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를 새끼줄로 목 졸라 죽이게 된다. 그의 나이 30세로 1799년 음력 2월 29일(양 4월 3일)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는데 그의 시신은 맞은 흔적이 없이 원상복구 되었다고 한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신앙생활을 하던 홍주 백정 출신 황일광(시몬)이 잡혀 ‘해읍정법’이라는 그 당시 법에 의해 고향 홍주로 보내져 혹독한 형벌을 감내하다가 참수 당하게 된다.

 

 

 

 

 

 

 

                                          황일광 시몬.

그는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참수의 칼을 기쁘게 받았다.

이후 1812년 12월경 홍주 배울(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배울) 출신의 이여삼이 교수형 직전 자신에게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주며 순교의 영광을 받았고, 1837년에는 김윤우(시몬)가, 1839년 기해박해시에는 홍주 청정이 출신의 유바오로와 홍주 다래골(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 출신의 최대종(요셉)이 옥사하게 된다.

홍주 지역뿐만 아니라 이 시기부터 조선의 천주교회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주문모(야고보)신부 이후의 사제가 다시 영입되어 암흑의 시기를 보내던 조선 교회는 교회 부흥과 교세 확장의 시대를 연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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