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의 발전과 세계사와 인간의 운명을 무기(武器), 병균(病菌), 금속(金屬)이라는 세 가지 요인을 통해 전체적 시각에서 통찰한 세계적 명저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1937~)는 자신이 일곱 살 때부터 열렬한 조류관찰자였음을 자랑스럽게 고백한다.
그의 어머니는 교사이자 언어학자였고, 아버지는 의사였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을 갔다가 4학년 때 생태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분자생리학, 진화생물학, 생태지리학 등을 공부하면서도 언어학,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등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다학제적· 인문학적 섭렵과 남다른 교육적인 배경(educational background)들이 그의 고전적인 저작들과 학문적 성공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타이타닉>, <아바타> 등으로 유명한 제임스 캐머런(1954~) 감독은 어린 시절, 자연사 박물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표본들을 관찰하는데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오늘의 자신을 만든 것은 매우 컸던 호기심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호기심이 세계 최고의 흥행대작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캐머런 감독의 이 같은 언급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서정주(1915~2000) 시인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캐머런 감독의 <타이타닉>은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비극에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결합하는 상상력을 보인 걸작이며, <아바타(Avatar)> (아바타-분신, 화신을 뜻하는 말.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 힌두교에서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 최근에는 인터넷 공간에서 가상육체 등의 의미를 갖는다.)는 지구에서 4004광년 떨어진 새로운 세상 판도라(Pandora-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인. 판도라의 어의(語義)는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를 창조해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우주를 향해 무한히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융합, 통섭이 화두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이 만나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협동하고 접점을 찾고 있는 추세다.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 선생은 다양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비빔밥이며,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우리는 멀티미디어 시대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융합의 가치와 확장의 정신을 웅변하는 ‘예술은 비빔밥’이라는 그의 천재적인 견해와 통찰에 우리는 새삼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치열한 IT산업 현장에서 뛰어난 창의성과 통합적인 상상력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은 통합적 경영자 스티브 잡스(1955~2011)는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있다.”, “해군(海軍)이 아니라 해적(海賊)이 돼라.”는 등의 명언들을 남기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이 같은 말은 우리들의 바람직한 미래는 어떤 한계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백남준 선생이 말한 융합의 ‘비빔밥’이나 스티브 잡스의 ‘해적’ 개념 등은 모두 같은 연장선상에 있으며, 결국 창조적 발상과 새로운 혁신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어떤 경계를 뛰어넘어야 나올 수 있다는 지적들이다. 어떤 틀을 벗어나는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손색이 없다. 우리는 새를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조류도감의 새들에 대한 설명은 매우 정확하고 우수하다. 인터넷의 지식검색보다도 조류도감의 설명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한다. 새를 생물학적, 해부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조류도감이나 조류학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새를 역사·철학·문학이라는 인문학적 견지에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각의 새로운 확장이라는 기회를 준다. 인간은 이런 지각의 새로운 확장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크게 진전시켜 왔다. 특히 새를 인문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새로운 융합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새에 대한 인문학적인 이해의 목적은 결국 우리 인생을 명상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또 새를 인문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동시에 킬러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시각을 넘어서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데도 새가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조류(鳥類)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나, 융합과 통섭의 가교로서, 학제간의 생산적인 연구대상이 되고, 새와 관련된 과학과 인문학이 융합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이 계속 나오기를 그야말로 학수고대한다.
새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력이나 융합의 시도들이 결국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미완(未完)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며, ‘원시스프의 먼지에서 태어나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우리 인간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젊으나 늙으나, 일을 하나 잠을 자나, 사나 죽으나, 자연에서 무엇인가를 얻어야하고 거대한 우주 앞에서 끝없이 겸허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총이 우선이냐, 글이 우선이냐’는 질문은 부질없는 우문에 속한다. 동(東班)과 서(西班), 문(文)과 무(武), 인문학 분야와 이공계 분야를 철저히 분리하고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를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와 역사에서 문과 무는 완전히 섞여 있고 통합되어 있다. 그리고 결론은 총(武)을 가진 글(文)이 강하다. 무기(武器)가 없는 문약(文弱)한 문장으로만 가치 있는 진정한 업적들이 가능한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신체와 정신, 문과 무, 부분과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데서 인간과 세상을 바꾸는 힘이 생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점과 해결책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장의 치열함을 모르고 책상물림의 나약한 문사(文士) 체질만으로는 강건한 상무정신에 바탕을 둔 통합적인 정신세계를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극복할 수 없다고 보인다. 무(武)라는 것이 단순히 사람을 찌르고 베는 창검의 기술과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칼은 붓이 추구하는 완벽한 이상(理想)과도 상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날카로운 명검(名劍)의 맑고 눈부신 검기(劍氣)는 빼어난 문장(文章)과도 같고, 뛰어난 무장(武將)은 결과적으로 문치(文治)와 무위(武威)· 예악(禮樂)의 성세(盛世)를 이루어왔다. 문의 역사는 무의 역사와 엄격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발전해 온 것이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을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바꾸면 융합이고 통섭이다. 중국이 추구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편치 않지만, 그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은 문(文)과 무(武)의 소통과 융합이며, 결국 힘이나 재물, 기술 같은 무(武)와 역사와 문학 같은 문(文)이 서로 뚜렷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는 통합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