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한밭’ 지명을 대전과 태전을 혼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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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한밭’ 지명을 대전과 태전을 혼용했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6.19 16:5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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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은 해당 지역의 과거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한 번의 잘못된 지명의 개명은 본래의 뜻을 일그러뜨리고 사실을 비틀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땅이름은 우리말이었지만 기록에는 한자지명으로 남겼기에 우리말 지명이 홀대를 받은 측면이 강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체계는 부(部)-방(坊)-계(契)-동(洞) 4단계였다. ‘전국 방방곡곡’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한자식 행정체계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마을을 ‘고을’이라고 했고, 고을의 수령은 높든 낮든 모두 ‘사또’라고 불렀다. 따라서 토박이 지명은 조선시대 한자로 지명화됐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됐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하는 대목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의 대전 지도.

 

1945년 해방 당시의 대전 지도.

한밭 ‘대전’ 고유지명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으로 논란
일제시대 행정지명 우리말을 한자말로 바꾼 대표적 사례
일본식 발음으로 태전과 대전이 같아 혼용해서 쓴 결과
1935년 대전부(府)로 승격 오늘의 대전광역시 모체가 돼

대전광역시의 ‘대전(大田)’이라는 이름은 원래 ‘태전(太田)’이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대전’으로 바뀐 것이라는 주장과 간행물과 언론보도가 1980~90년대에 제기되어 학계는 물론 언론계, 종교계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대전시지(중), 1979)〕에는 ‘처음에 태전(太田)이라 하다가 뒤에 대전(大田)으로 고친 것’이라 하였고, 〔한밭승람(호서문화사, 1972)〕에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얼마 전 개통된 경부선 철도를 시찰하기 위하여 특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다가 대전역에서 잠시 멈추게 되었는데, 이때 이토가 역장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태전이라고 하자, 이토는 즉석에서 이곳은 형승 웅위한 지세로 보아 대전(大田)이 좋으니 앞으로는 태전이라 부르지 말고 대전으로 고쳐 부르시오.’하고 지시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후부터 태전이라 부르던 곳이 대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한밭정신의 뿌리와 창조(대전직할시, 1991)〕에도 ‘대전이란 지명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지명이 아니라 한밭의 지명을 한자식 표기로 태전이라 쓴 것을 한일합방 이후 1905년 경부선 철도역을 이곳에 지은 일본 사람에 의하여 대전으로 고쳐 부른 후부터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전 삼성동 대로변에 태전로와 우암로의 이정표가 걸려있다.

이처럼 여러 문헌과 자료들이 원래 태전이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지금의 대전으로 바뀐 것이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던 것이다. 그러나 태전이 대전으로의 변경은 착오와 오류가 결합되어 생겨난 오해로 ‘대전’은 일제에 의하여 바뀐 이름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보다도 ‘태전’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일본인들이 잘 쓰는 이름으로 일본에도 ‘태전’이라는 지명이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그들 자신이 관보에 게재할 때도 태전역(1904), 태전우편수취소(1905), 태전경무분소(1906), 태전우체국(1908), 태전경찰서(1910) 등 ‘태전’을 계속 사용해 온 탓으로 우리가 사용하던 ‘대전’이라는 이름과 혼용되어 오다가 ‘대전’에 밀려 ‘태전’이 도태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가 태전을 대전으로 고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태전을 선호했으나 대전에 밀려 태전이 사라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연이 이러함에도 당시 태전의 ‘태(太)’에서 점(·)을 떼어낸 것은 남자의 몸에서 성기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김정곤 향토사연구가에 따르면 “여러 해 전 모 단체에서 ‘태전이름 되찾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특정 종교단체의 태전환원은 자신들의 종교와 연관시킨 주장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태전을 운위하지만, 그 종교가 등장한 시기는 20세기 초이니 설득력이 없다. 또 한 때는 ‘선조들이 전해준 원래이름은 태전’이었다거나,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지어 준 오욕의 지명’이라는 등 그럴듯한 말들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이런 왜곡된 사실은 일제 강점기 호남일보가 발행한 ‘충청남도 발전사’에서도 확인된다. 

이후로도 대전시의 간행물이나 지역인사들의 저서에도 나타난다.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사람들도 ‘콩밭을 의미하는 태전이던 것이 일본인에 의해 대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주장했다. 이들 중에는 향토문화 책임자와 지명(地名)위원, 언론계의 중진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태전이란 지명은 고증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하고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 역사가 먼저다. 그런데도 잠시 왜곡되었던 일이 정설처럼 되고 말았다. 대전시내 삼성동의 대로변 전봇대에는 태전로와 우암로의 이정표가 버젓이 걸려있다. 오히려 태전로가 더 커 보인다. 우암로는 우리 고장의 선현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뜬금없는 태전로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우리의 옛 지명을 보면 한산(韓山)이 대산(大山)이 되고, 한여흘이 대탄(大灘, 용비어천가)이며, 한내가 대천(大川), 한비가 대우(大雨), 한실이 대곡(大谷)으로 되었듯이, 또 대밭이 죽전(竹田), 쑥밭이 애전(艾田), 삼밭개가 삼전도(三田渡)가 되었듯이 대전은 ‘한밭’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대전(大田)의 지명(地名)은 ‘동국여지승람(1486) 공주목 조’에 ‘대전천(大田川)은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으니, 전라도 금산군 경계에서 발원한다. 이상의 세 냇물이 합류하여 회덕현의 갑천이 되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호서읍지, 임원경제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여러 문집 등 곳곳에 ‘대전’이라고 나오고 있어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대(大)’와 ‘태(太)’의 발음이 같으므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글자로 표기하든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일제시대의 관보에는 ‘대전’과 ‘태전’이 혼용되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일부 지명 학자들도 “대전은 곧 전통적인 명칭인 한밭의 한문표기이므로 태전의 개명설은 일본식 발음으로 태전이나 대전이 같아서 일본인들이 두 가지를 혼용해서 쓴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전(大田)은 문헌상 처음 대전천(한밭내)으로 등장하다가 1895년(고종 32)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大田里)로 나오면서 처음으로 행정구역상 단위 지명으로 소개된다. 1901년 경부선 철도역에 ‘대전역’이 설치됨으로써 주변지역이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1914년 일제에 의한 군면 폐합에 따라 대전군이 설치되기에 이르고, 이때 대전면(面) 대전리(里)가 된다. 이후 1931년 대전면이 대전읍(邑)으로 승격되고,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충청남도 도청이 대전읍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1935년에는 대전부(府)로 승격됨으로써 오늘의 대전광역시 모체가 되었다. 우리나라 지명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일제시대 행정지명을 정리하면서 순수 우리말이 대거 한자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앞서 언급한 한밭, 즉 대전(大田)이다.

대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실로 장구하다. 둔산동 선사유적지를 비롯하여 비래동 및 용호동 유적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땅의 오래 전 이름은 ‘한밭’이었다. 한밭을 한자로 ‘대전(大田)’이라 한 것이다. 한자의 ‘대(大)’와 ‘태(太)’는 같은 의미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유명사 대전은 ‘태(太)’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전은 태전이 아니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하는 측면이다. 현재 우리나라 행정구역 중 순수한 우리말로 남아있는 것은 서울 하나뿐이다 한문글자 일색의 행정구역 명칭에 천신만고로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 하나가 외롭고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소부리(부여), 한밭(대전), 솜리(이리)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은 이미 땅속에 묻혔다는 사실이 아픈 역사로 남아 있는 현실이다.

대전의 오십대 중견 언론인 손아무개 씨는 “백제의 영욕이 아로새겨진 충청도 땅은 역사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사람들의 모듬살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정조임금이 청풍명월의 고장이라 일컬었던 대전은 청주와 함께 그 핵심을 이루는 도시다. 대중가요 대전발 0시50분, 대전부르스의 애잔한 가락이며, 대전역 플랫홈에서 후루룩 들이키던 가락국수의 아련한 맛을 기억하는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고향이 아닐지라도 추억의 도시임에는 분명할 것”이라며 “이 기회에 ‘대전’을 서울처럼 순수한 우리말인 ‘한밭’으로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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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신 2021-01-04 20:35:10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1. 비록 대전천이라는 지명이 보이더라도 그것이 대전의 본래 지명이 태전이였음을 100%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2. 대전은 예로부터 한밭 또는 콩밭으로 불렸는데 두가지 뜻을 모두 포함하는 것은 대전이 아니라 태전입니다. 3. 이토히루부미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다나카 레이스이(田中麗水)가 쓴 ‘大田發展誌(대전발전지)’란 책에 정확히 이토가 태전역에 왔다가 대전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4. 대전토박이들(1910년 이전 출생자들)도 모두 어렸을때 태전으로 불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볼때 태전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만세 2017-02-27 04:11:16
치욕적인 홍성군민이 아닌 자유대한의 홍주시민으로 살고 싶다.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친일파다. 일본으로 꺼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