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어느 굼벵이의 고백
상태바
[특별기고] 어느 굼벵이의 고백
  • 정규준 <홍성도서관문예아카데미 회원>
  • 승인 2015.10.12 14: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굼벵이야. 내가 사는 곳은 톱밥과 기름진 퇴비가 섞인 상자 속이야. 우리는 먹고 자고 팬터마임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그런데 나는 그런 일상이 행복하지가 않은 거야. 내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건지 알고 싶었어. 그러나 아무도 말해주는 이가 없었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굼벵이로 낙인찍혀 무리에서 잊혀 가고 있었지.

어느 날이었어. 우리의 보금자리가 파헤쳐지면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어.
 “굼벵이들이 잘 자랐네. 무게도 실하게 나가고 값도 제대로 받겠어.”

동료들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박스에 담겨졌어.
“이 녀석은 아주 형편없네. 상품가치가 엉망이야.”

누군가가 마당 한 구석에 나를 던져버렸어.
부르릉, 굉음이 들리면서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갔어.

홀로 버려진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 빈사상태로 누워 있었어. 친구들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지. 내 속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잃지 않고는 찾을 수 없고, 버리지 않고는 취할 수 없다.’

그때 어디선가 한낮의 적요를 깨는 소리가 들려왔어. “맴맴맴맴 맴―.”

내 속에서 본능처럼 꿈틀대는 무언가를 느꼈어. 나의 유전자는 고속으로 기억의 필름을 돌려 그것이 ‘매미’라는 것과, 되어야 할 나의 실체임을 알아냈어. 매미는 나무 수액을 빨아먹고 있었지. 동료들이 간 곳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 사람들이 주는 좋은 먹이를 먹으며 우리는 약용으로 사육되고 있었던 거야. 내 속에서는 본래 모습을 찾아야겠다는 강한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어.

나무 위에 올라가려 했지만 올라갈 수 없었어. 말벌과 사마귀가 공격해왔어. 안간힘을 다하여 도망쳤지. 매미가 되기 위하여 좀 더 성장이 필요했던 거야. 나는 땅속 깊이 파고들어갔어. 내가 자랄 은신처가 어둠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파악했다고나 할까. 나무뿌리에 빨대를 꽂고 수액을 빨기 시작했어. 난 생 처음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꼈어. 주변에서 다른 굼벵이들도 수액을 먹고 있더라고. 그들도 나처럼 버려진 존재였던 거야.

우리는 어둠에 적응해 갔어. 어둠은 품어주고 씻어주고 채워주는 바다 같은 거였지. 가없는 잠김 속에 생명을 보듬고 유영하는 모성의 기운이랄까. 빛이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어둠 속에서 성장한 빛은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는 사랑이 되었노라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우리의 몸에 발자국을 내며 지나고 또 지났어.

그렇게 일곱 해 정도가 지났을까. 우리는 지하에 있었지만 빛을 느낄 수 있었어. 그것은 우리 몸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지. 겨드랑이가 가려워. 아, 나의 계절이 오고 있음을 느껴. 비록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이제 세상에 나가 맘껏 울어볼 거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