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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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7〉
  • 조현옥 전문기자·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1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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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공소行 편지

새벽까지 비가 왔기 때문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홍주문화회관 앞에서 11시 20분에 출발해 구항 황곡리를 지나갑니다. 비가 온 후라도 춥지 않아서인지 배추밭에서 김장용 배추를 뽑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막 늙은 호박을 따서 들고 가는 어르신도 보이는군요. 요즘 황곡리 마을은 여러 가지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초입에 다양한 팻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산으로 통하는 큰 길을 사용하지 않고 예전 길, 아직도 완행버스가 다니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구항면사무소에 도착하기 전 수선화를 곱게 가꾸는 할아버지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맘때면 마늘을 심듯 수선화 구근을 집 둘레에 심어 이른 봄 활짝 핀 수선화를 선물하는 집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할아버지 집은 전기회사가 들어와 새로 건물을 올렸군요. 수선화 철이 끝나면 밭에 심은 감자꽃 구경하다가 어느 날 밭에서 금방 캐내는 감자를 즉석에서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두 분중에 누가 돌아가셨을까 걱정을 하면서 면사무소 뒤를 휙 둘러봅니다.

저 곳에도 어느 종택의 빈 집이 있었는데 봄이면 집안 가득 수선화가 지천이었지요. 벌써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그 자리에도 누군가 이층집을 지었군요. 면소재지에 있는 찻집에 들러 주인이 직접 달였다는 쌍화차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말린 가을국화가 정취를 더해줍니다. 밤이며 대추, 잣과 여러 가지 견과류가 들어 있는 쌍화차를 맛있게 마시고 나오려니 주인께서 할아버지댁 소식을 전해줍니다. 돌아가신 게 아니라 몇 년 전 이사하신 것 같다고요.

“백월산 등산 다녀왔냐?”는 질문에 “그냥 갈산까지 걸어간다”고 했더니 홍성서 구항까지 얼마나 걸리냐 궁금해 합니다. “1시간 10분요.”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데 그렇게 머냐는 주인의 얘기를 뒤로하고 다시 공리로 향합니다. 공리는 1908년 ‘수곡 본당’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 홍성 본당 신자들에게는 잊혀 진 곳입니다. 영진콘크리트 회사가 있는 고개를 넘으니 주변에 노박덩쿨나무가 지천입니다.

공리 마을을 접어드니 멀리 대숲이 있는 옛 수곡 본당 자리가 보이는군요. 마을회관을 지나자 엿기름을 말리는 할머니가 계시고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려고 사다리를 가지고 나오는 할아버지 한 분도 보입니다. 정겨운 풍경입니다. 잘 자란 갓을 뽑고 있는 부부에게 길을 물어 목적지에 당도했습니다. 10년 전 홍성본당 신부님과 찾아왔던 기억을 더듬어 어제의 일과도 같이 하나도 변함없는 절집을 만납니다.

옛 고택과 같이 본채를 옆으로 작은 덧문이 있는데 주인이 거처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불렀더니 젊은 여자 한 분이 나오며 인사합니다. 여주인께서 따라 나왔는데 찾아온 연유를 말씀드리자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니”라며 혹시 바로 옆 두 집들이 그런지 모르겠다면서 가보라고 말을 하는군요. “원래 이곳은 수덕사 만공스님께서 정해준 곳으로 계속해서 절집”이라는 것이 골자입니다. 괜히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10년 전 찾아왔을 때는 이 분께서 차를 대접해 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뭔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도 여간 서운한 게 아닙니다. 무엇을 얻으러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서 1908년 시작된 수곡성당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을까하는 조그만 희망 같은 것이었습니다.

합덕성당과 수곡성당을 관할하던 라리보 신부의 1916년 12월 31일자 ‘홍성군 공리 천주당 관할’ 교계표에 의하면 홍성군 관내 천주교 신자가 169명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수곡성당의 총 신자는 예산, 서산을 합쳐 1376명으로 나와있지요. 당시 라리보 신부는 합덕성당 관할과 수곡성당 관할 두 군데의 사목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1908년 수곡성당의 첫 주임신부인 폴리신부가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로 징집돼 갔기 때문입니다. 

두 군데 사목의 방대함으로 다시 안학만(루카) 신부가 수곡성당에 1917년 9월 22일 발령을 받았지만 수곡성당이 있는 구항면 공리로 부임하지 않고 서산에 있는 금학리에 도착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수곡공소보다는 금학리가 성당의 입지로 적합하다는 사목적 판단과 함께 주교의 의지도 그러함을 공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안학만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7년 12월 3일자 서한에 ‘금학리는 주교님이 정하신 곳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어 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금학리 공소는 다시 상홍리로 옮겼다가 현재의 서산 동문동 성당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합덕성당과 공세리성당 이후 대전 충남지역에서 4번째 성당이었던 수곡성당이 홍성군(당시 결성군·이후 홍성군으로 개편됨)에서 서산시로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공리 근처로 신자들이 이주해 오기가 어렵다는 점과 주변에 천도교 신자들이 많아 전교가 어려웠던 점을 들어 불가피 신자가 많고 공소가 많은 금학리로 옮기는 것이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홍주지역의 신자들이 선교사를 요구해 1908년에 ‘결성수곡본당’이 성립됐다는 이야기로 봐선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어쨌든 1908년부터 1917년 10월 안학만 신부의 금학리 공소로 부임까지의 10년간을 수곡본당 시절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후 수곡은 ‘수곡 공소’로 다시 불리고 근처 신자들은 서산 금학리로 대미사를 보러 다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참고로 홍성본당은 1950년 강만수(요셉)신부의 파견으로 본당의 역사를 시작하나 그 근저에는 홍주지역 신자들의 이러한 신앙생활의 전역사가 있었기에 수곡본당의 역사를 홍성본당의 전역사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주인의 안내대로 절집을 나와 바로 우측에 자리 잡은 붉은 블록담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연세는 60세 전 후반 되신 분(임광산)으로 할아버지가 여기서 천주교 신자생활을 하셨다고 증언하시는군요. “할아버지 연세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126세 정도 되셨을 것”이라는 임 씨는 집에 주물로 된 십자가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며 자세한 십자가의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옆에 처음 살았으며 할아버지 때 이 근처에 성당을 짓고자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지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며 근처에 천주교인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1917년 당시 상황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방금 전 들린 절집은 불교의 사찰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전통적 무속신앙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100여 년 전 기억 없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나마 누군가가 여기서 신앙생활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다행입니다. 다시 길을 잡아 갈산 쪽으로 향합니다. 다시 쓸 때까지 그대의 영혼이 건강하기를.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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