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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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5〉
  • 조현옥 전문기자/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12 1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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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공소行 편지

6·25전쟁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벌써 65년 전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터지자 합덕성당에서는 주임 페랭 백 신부, 윤복수(레이문도) 총회장, 송상원(요한) 복사가 성당에서 체포됐습니다. 

물론 교우들이 페랭 백 신부에게 피난을 권했지요. 그러나 그분은 “전쟁 후 교회를 위해서 보좌신부님을 피난 보냈지만 나는 안 가지. 나는 공산당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지. 나는 천안의 심 신부, 당진의 공 신부 등 신부님들과 모두 순교하기로 결정했어. 나는 끝까지 남아서 교우들과 함께 있다가 순교할 것이지. 나는 고국을 떠날 때 부모님들과 천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렇게 순교할 수 있는 기회에 왜 가나? 천주께 감사해야지” 하면서 본당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은 이렇게 됐습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을 앞두고 8월 14일 페랭 신부는 고해성사를 주고 있었지요. 그때 공산군 세 명이 차를 타고 와서 군화를 신은 채 성당으로 들어왔고, 이를 본 신부는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버릇없이 마구 들어와. 너희들은 방에 들어갈 때 신을 신고 무례하게 들어가니? 여긴 성체를 모셔둔 거룩한 곳이다”라고 소리쳤답니다. 그러나 공산군은 성물과 기도책을 내던지며 행패를 부리다가 성당 밖으로 나가 페랭 신부 앞에서 성당 종각의 십자가를 겨누고 쏘려고 했다는군요. 페랭 신부는 재빨리 총부리를 잡아 자기 목에 대고 “나를 쏘라!”고 고함을 쳤고 기세에 눌린 공산군은 방아쇠를 놓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후 페랭 신부는 나뭇가지로 위장된 차에 태워졌습니다.

본당 신부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윤복수 총회장이 현장에 왔습니다. “너는 누구냐?”고 묻자 “나는 본당 회장이요, 신부님과 함께 데려가시오.” “너도 차에 타!”하고 끌어올려졌습니다. 1분도 안 돼 송상원 복사가 나타나 가는 차를 막았고 “나는 신부님을 모시는 복사요, 나도 잡아가시오.” “그렇다면 너도 타라!”해서 세 명이 당진성당 아래 군청자리에 있는 내무서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9월 29일 밤부터 갇혀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끌려 나가 처형됐는데 이때 윤 회장과 송 복사도 학살됐습니다.

공산군이 철수하면서 페랭 신부는 9월 22일 경에 예산을 거쳐 대전 목동 형무소로 압송됐고 9월 23~26일 사이에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때 예산 본당 리샤르 이 신부와 온양 본당의 를뢰 노 신부가 예산성당에서 함께 체포돼 예산 내무서에 갇혀있었다가 당진 코르데스 신부와 합덕 페랭 신부와 함께 트럭에 실려 목동 형무소로 압송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중촌동에 만들어진 대전형무소는 한국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습니다. 6·25전쟁 중에서는 충청남도에서 잡혀온 우익 인사들로 감옥이 가득차자 가까운 곳인 목동 수도원과 성당에 분산 수용했습니다. 목동 형무소라고하면 이 시기의 목동 수도원을 일컫지요.
공산군은 북으로 퇴각하면서 일부는 수도원에 불을 질러 태우고, 일부는 1951년 1월까지 계속된 ‘죽음의 행진’으로 중강진까지 끌고 갔지요. 

목동 수도원에서 순교한 분들 중에서 홍성 본당의 첫 사제인 강만수(요셉)신부가 있답니다. 강 신부는 홍성에 1950년 4월에 부임해 본당 신축과 관련해 애를 쓰다가 홍성에 공산군이 주둔하기 이틀 전, 전쟁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당시 본당 회장인 남정우에게 본당을 잘 돌보라하고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강 신부의 동생 강경수(요한)는 하사관이었는데 후퇴하며 7월 중순경 대전까지 내려왔다가 강 신부를 만났을 때 자신의 차로 피난하자고 설득했으나 “너는 군인으로서 할 일이 있고 내가 알 일은 따로 있다”며 홍성을 향해 떠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가는 길목인 공주에서 막혀 공주 교우들 집에 숨어 은밀히 성무활동을 하게 됩니다. 강 신부의 활동을 적극 도운 이항진(토마스)는 대전공업학교 수학선생이었는데 8월 15일 조금 지나서 둘은 함께 체포됐습니다. 이들은 이송 중에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공주에서 잡힌 사람들을 태운 낡은 목탄 트럭이 대전으로 가는 마티 고개를 힘겹게 넘어갈 때 사람들이 하나둘씩 뛰어내렸다고 하는데, 강 신부는 “다 도망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며 그대로 남았다고 합니다. 

합덕성당 한켠에는 6·25때 순교한 세 분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홍성성당의 추모공원에도 강만수 신부의 묘가 쓸쓸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동 수도원에서 함께 불타 순교한 분들 중에는 개신교 성직자들도 상당히 있다고 합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대전 교구에는 14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전쟁 초기 미군의 방어선이 금강으로 설정됐기 때문에 이 강을 중심으로 인적 피해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금강 이북에 위치한 10개 본당 중 9개 본당의 주임 신부가 공산군에게 피살되거나 납북된 후 사망했고, 이남에서는 군사 작전상 명령에 의한 피난으로 목동 수도원을 지키던 카타르 강 신부만이 납북돼 순교해 피해가 적었다고 합니다. 즉, 공세리, 합덕, 당진, 예산, 온양, 홍성, 서산, 금사리, 천안성당의 주임신부들이 그 대상입니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교우들을 지키며 순교한 이 분들은 지난 8월 20일, 로마 교황청에 의해 ‘하느님의 종’으로 지정됐습니다. 세 분의 순교자를 낸 합덕성당은 이후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40명에 가까운 사제가 나왔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 건너와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전파한 선교사들의 삶을 되새겨 볼 때입니다. 다음은 홍성본당보다 더 먼저 생긴 구항면 공리에 있는 수곡본당 자리를 거쳐 갈산공소까지 걸어갈 생각입니다. 다시 전할 때까지 그대의 영혼이 건강하기를.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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