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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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9〉
  • 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2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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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한옥양식의 130년 역사 간직한 상홍리 공소
▲ 상홍리 공소 전경.

1908년 홍주(洪州)에 수곡(결성)본당 설립 초대 폴리 신부 부임
덕산, 해미, 서산, 홍주, 결성관할 신자 본당·공소 합쳐 1305명
1918년 금학리 본당 관할 구역은 서산과 홍성, 공소는 18개소
1921년 폴리 신부 “가장 아름다운 상홍리 성당을 건축 중”보고

1918년 금학리 공소 관할 서산과 홍성, 공소는 18개였다. 신자는 본당과 공소를 합쳐 1820명
상홍리 공소는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에 있으며 과거에는 ‘가재공소’라고 불렸다. 가재는 갈재 밑에 있는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이 마을에 공소가 세워진 것은 적어도 1884년 이전의 일이었다. 1880년대 초, 충청도의 중앙과 서부지역을 담당하던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의 1883~1884년도 교세 통계표에서 가재공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공소 이름만 있을 뿐, 신자 수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자 수는 1884~1885년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나오는데, 당시 81명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102명으로, 서산에서 가장 큰 공소였다. 그러나 1886~1887년도에는 신자 수가 52명으로 급감하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1890년대에는 30명대에 머물렀다. 가재공소는 1890년까지 두세 신부의 사목 하에 있다가 1890년 양촌 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양촌 본당의 초대 주임 퀴틀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는 1899년에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본당을 합덕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가재공소는 1908년 수곡 본당이 설립되어 그 관할 공소가 될 때까지 18년 동안 양촌(1899년 이후 합덕) 본당 신부의 사목 하에 있었다.
 

▲ 서산 상홍리 공소 안내판.


주목할 대목은 충청도 홍주(洪州)에 수곡(결성)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08년이다. 당시 홍주지역의 신자들은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합덕 본당의 크렘프(Krempff, 慶元善, 1882~1946) 신부도 그것을 희망하였다. 1907년도 서울교구 연보에 따르면, 크렘프 신부는 결성지역의 개종운동을 설명하면서 많은 예비 신자들의 교육을 가까이에서 보살필 수 없음을 토로한 바가 있었다. 뮈텔 주교는 크렘프 신부에게 주어진 부담이 과중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본당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1908년 수곡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폴리(Polly, 沈應榮, 1884~1950) 신부가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의 교세 통계표가 없어 관할 구역과 신자 수를 파악할 수 없지만, 다만 1909~1910년도 통계표를 보면, 관할 구역은 덕산, 해미, 서산, 홍주, 결성이었고, 신자 수는 본당과 공소를 합쳐 1305명이었다.

20대의 젊은 폴리 신부는 열의에 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1년 서산과 태안에 2명의 전교 회장들을 보냈으며, 1913년경에 회장들을 위한 피정을 마련하여 기도와 교리 강의 등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희망했던 것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특히 수곡 본당과 인근 지역이 그의 근심거리였다. 결성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본당 주변의 마을들에는 천도교(天道敎)인들만 살았기 때문에 새 신자들을 얻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던 폴리 신부는 1914년 본당을 떠나게 된다. 그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일부가 소집령을 받아 프랑스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폴리 신부가 포함된 것이다. 그와 함께 합덕 본당의 크렘프 신부도 소집령을 받아 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뮈텔 주교는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신부에게 합덕 본당과 수곡 본당을 맡도록 하였다. 라리보 신부는 서산, 당진, 예산, 아산, 홍성 등을 맡아 3500명이 넘는 신자들을 사목했다.

1917년 4월 19일 서울 대목구장 대리이자 약현 본당 주임인 두세 신부가 선종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대목구는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는데, 라리보 신부가 교구의 당가(경리)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합덕과 수곡 본당을 맡을 신부가 공석이 되었지만, 신부들의 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임명을 그해 9월에 있을 서품식 이후로 미루기로 하였다. 9월 22일 서품식이 거행되어 4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1884~1956) 신부는 합덕 본당, 안학만(安學滿, 루카, 1889~1944) 신부는 수곡 본당의 신부로 각각 임명되었다. 10월 2일 안학만 신부는 서울을 떠나 부임지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수곡 본당이 있는 홍성군 구항면 공리가 아닌, 서산군 팔봉면 금학리(소길리)였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간 금학리의 본당 위치 문제로 공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즉 모든 교우들이 금학리는 교우들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중심지는 용장리다, 여미다, 해미다, 상홍리다, 산성리다, 이렇게 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산성리 교우들은 본인을 찾아와서 “2000원으로 50여 칸의 기와집을 마련할 것이니 우리한테 오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금학리는 주교님이 정하신 곳이다. 그러므로 주교님의 지시 없이 이렇게 행동하면 그것은 불복이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좀 진정된 것 같습니다만, 단념한 것은 아닙니다. 폴리 신부의 신부댁은 이미 2800원에 팔렸는데, 계약금 400원은 전 요왕이 받았습니다.

이 글은 안학만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7년 12월 3일자 서한의 일부다. 본당의 소재지를 두고 서산지역의 공소 신자들 간에 논쟁이 발생하자, 안 신부는 금학리에 본당이 세워지는 것이 뮈텔 주교가 정한 것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를 통해 뮈텔 주교가 본당의 이전을 결정하고 안 신부를 서산으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뮈텔 주교는 왜 본당의 이전을 결정하였고, 서산의 공소들 가운데서도 소길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곡 본당과 인근지역이 사목상의 어려움이 많았다는 점이다. 라리보 신부도 냉담자가 많고 비신자들의 개종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수곡 본당에 대해 비판적인 전망을 내보였다. 뮈텔 주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본당의 이전을 결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본당의 이전지로 서산 금학리를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오랜 역사를 가진 견고한 신앙 공동체였고, 수곡 본당의 공소들 중에서 가장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학리 공소는 두세 신부의 1883~1884년도 교세 통계표에 나올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공소였다. 또한 퀴틀리에 신부와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1866~?) 신부가 거처한 적이 있었으며, 여러 명의 신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신자도 많아 1916~1917년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금학리 공소의 신자는 288명에 이르렀다.

1918년 당시, 금학리 본당의 관할 구역은 서산과 홍성으로, 공소는 18개였다. 신자는 본당과 공소를 합쳐 1820명이었다. 상홍리 공소도 금학리 본당의 관할 공소들 중 하나였고, 신자수는 121명이었다. 기존에는 상홍리 성당이 1919년에 건축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자료를 확인한 결과, 성당이 세워진 것은 1921년이었다. 1921년 3월 폴리 신부는 “그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하는 중”임을 서울교구에 보고하였다. 상홍리 공소는 전통적 한옥으로 목조 건축양식을 비교적 온전히 갖추고 있는 근래에 보기 드문 근대건축물이다. 문화재청은 상홍리 성당이 ‘서양의 종교 공간에 한옥의 구법을 활용한 귀중한 자료’임을 인정하여 지난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하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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