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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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3〉
  • 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0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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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대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수철리 공소
▲ 예산 수철리 공소 전경. 황해진 알렉산델 공소 회장을 비롯해 20여 명 신자들이 순교신앙의 맥을 지금까지 잇고 있다.

1962년 간양리공소 신례원 창소리로 옮겨져 신례원본당으로
간양리·수철리 6·25전쟁 때 공산당(빨치산)세력 활발했던 곳
간양골공소와 함께 수철리공소 “신례원성당의 뿌리로 봐야”


예산군 예산읍 수철리는 수려한 산세와 청정한 자연속에 깃든 작은 마을이다. 이곳 수철길 630, 오르막 길가 옆에는 수철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수철리공소에서 산자락을 넘으면 간양리 본당 터가 나온다. 옛날 철을 많이 생산하여 ‘무쇠골’이라고도 불렸다. 전통가옥에 썼던 방장돌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용굴산, 안락산, 덕방산의 수려한 산세가 마을을 감싸고, 용굴산에는 창해사가 있으며, 북쪽 벼랑 끝에는 쇠서바위가 있다. 동쪽 사태말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정착한 곳이며, 도고느랭이 가는 옛 길은 동학농민군과 홍주의병 활동의 주요 길목이었다.

이곳의 수철리 공소와 간양리 공소는 산길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고개 하나 넘어 긴밀하게 연락하며 마치 한 공소처럼 생활하였다. 수철리에는 이미 박해시대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다만 간양골이 가깝기 때문에 정식으로 공소가 세워지지 않다가 1900년 경 퀴를리에 신부에 의해 공소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초 퀴를리에 신부가 작성한 공소 통계 자료에 ‘드른리(드르니)’라고 나오는 곳이 수철리이다.

향토사학자인 한성준 덕산고 교사는 “1901년 퀴를리에 신부의 연말 보고서에서 간양골 산뒤 ‘뒤란 공소’에 있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뒤란 공소’는 수철리의 별칭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구합덕본당 100사 자료집’에는 ‘드른리’를 수철리 또는 신례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엇갈리게 해석하였으나, 증언 내용과 지형 상의 특징, 문헌에 간양골, 고새울, 수골 등과 같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드른리’는 수철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병인박해가 계속되던 1868년에 일어난 오페르트 일당의 ‘덕산 남연군묘 도굴 사건’에 합덕 신리의 천주교 신자들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신리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졌고, 손자선 토마스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대를 이어 신리에 살던 손씨 일가는 풍비박산이 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하였다. 이때 손세당의 자손 손정호, 손영택(정택) 등이 수철리로(나중에 신례원으로) 이주하여 공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일제강점기 이후 수철리 공소는 인근 간양골 공소, 궐곡리(고새울) 공소, 송석리(수골) 공소 등을 아우르는 중심지가 되었다. 판공 때면 사방의 공소들에서 신자들이 수철리로 모여들어 미사를 드렸다. 1924년 페랭 신부의 연말 보고서에서 수철리 공소가 신자 수도 많고 인근 지역의 공소들 중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1927년 4월 21일자 페랭 신부의 서한에는 수철리가 전대사(全大赦)를 선포한 공소에 들어있다. 

당시 공소동정에 “궐곡리(蕨谷里, 고새울)는 예산읍에서 15리 떨어진 작은 마을. 담배 농사의 금지로 세 가족이 떠났습니다. 나머지 있는 사람들은 수철리(水鐵里)로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그래서 수철리 인구가 77명에서 94명으로 늘어났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대부분의 교우들이 전대사를 얻는데 참여했고, 두 번 참석한 교우들도 여럿 있습니다. 전대사는 본당 외에도 원머리, 매산리, 삼송리, 예산읍, 수철리, 신유리, 진말 등에서도 선포되었는데 진말에서는 이웃 마을의 교우들도 와서 참석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황석두(루가) 순교 성인의 손자인 황만호는 부친 때 박해를 피해 충북 연풍에서 이주해 와서 아산 만보골, 예산 수골(숫골)에 살다가, 일제 강점기에 (청년 시절에) 도고 신유리(느랭이)를 거쳐 간양골로 이주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거기서 밀양 박씨 부인을 맞아 결혼하여 살다가 앞서 본 바와 같이 한국전쟁 후 간양리 공소 강당이 폐지된 후 수철리로 이주하였다. 황만호와 그의 아들 황기완은 대를 이어 공소 회장직을 수행하며 순교 성인의 후손으로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960년 황기완의 주도로 수철리 ‘새터’에 15평의 목조 회칠흙벽 함석지붕의 강당을 신축하였다. 황기완의 친구 목수 두 명(둘 다 신자이며 대술 김씨, 황기완의 도고 신유리 친구)이 일을 맡아서 했는데, 건축 비용은 황기완이 구호물자를 경로를 통해 많이 타내서 그것을 매각하여 마련하였고, 신자들이 노력 봉사를 많이 하였다. 대들보는 ‘새터’ 맞은편 ‘접시골’(고새울 방향)에서 큰 소나무를 베어서 사용하였으며, 그 중 흠집이 있었던 대들보 하나가 조곡리 공소로 운반되어 사용되었다. 

아직도 수철리에는 황기완의 아들 황해진 전 공소 회장을 비롯하여 20여명의 신자들이 순교 신앙의 맥을 지금까지 잇고 있다. 20여년이 넘도록 수철리 공소 회장직을 맡고 있는 황해진(알렉산델·62) 회장은 황석두 루가(1866년 순교) 성인의 6대손이기도 하다. 그는 “작금의 공소 현실이 많은 젊은이들과 주민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어려워졌지만 순교 성인의 후손으로서 신앙을 이어나가고 공소를 활성화 하는데 모든 것을 바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인 정일순(도로테·56)여사와의 슬하에 3남 1녀를 둔 황 회장은 아버지(기완·요셉)의 대를 이어 공소회장으로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

한편 한성준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현재 신례원읍 용곡리에 살고 있는 이병하 전 회장의 부친 이재현(근성)과 숙부 이근명은 원래 서산에 살던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1910년대) 양친을 모두 잃고 호구지책으로 형 이근명(당시 14세)은 간양리로, 동생 이재현(당시 12세)은 수철리로 머슴살이를 오게 되었다. 이재현(요한)은 열심히 일해서 수철리에 조그만 땅을 마련하였고, 수철리에 살던 교우 윤씨(세실리아)와 결혼해서 9남매(딸 5, 아들 4)를 두었는데, 이병하 회장이 여섯째이다(아들 중 셋째). 워낙 가난한 살림이어서 이병하 회장도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비롯해서 머슴 일까지 하였지만, 부모가 성실하고 바르게 살면서 천주교 전통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기에 자식들도 다들 열심한 신앙 가정을 꾸리고 살게 되었으며, 사제 한 명과 수도자 한 명이 나왔다. 다섯째(아들 중 둘째)가 사제가 된 고(故)이인하 신부이고, 일곱째(딸 중 넷째)가 현재 경기도 요양수녀원에 있는 이희하 수녀”라고 했다.

이병하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공소 신자들에 대한 교리 교육은 주로 ‘교리문답’을 외우고 그 뜻을 새기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판공 찰고(察考)를 통해서 엄격하게 시행되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둔 신자는 ‘교리문답’을 다 외워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판공 찰고 때는 사제 앞에 신자들 여럿이 둘러앉아서 지목받은 사람이 사제가 질문하는 교리문답의 뜻을 설명해야 했다. 혹시 잘 대답하지 못하면 크게 책망을 들었는데, 이 당시에는 신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사제의 권위를 존중하고 사제를 존경했기 때문에 설혹 사제에게 성인 신자가 매를 맞는 일이 있더라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여서, 판공이 가까워지면 다들 열심히 ‘교리문답’을 외웠다”고 한다. 

이병하 회장도 어린 시절부터 ‘교리문답’ 전체를 달달 외웠고, 그 뜻도 잘 설명하곤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유서 깊은 간양골 공소에 이어서 일제강점기부터 이 지역 공소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수철리 공소도 1970년대부터 신자 수가 줄어들면서 결국 신례원 공소에게 중심지 역할을 내어주게 되었다. 1977년 신례원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간양리 공소와 마찬가지로 신례원 성당에 흡수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간양골 공소와 함께 수철리 공소 또한 신례원 성당의 뿌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문=한성준 향토사학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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