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병오의병의 진앙지 홍주 땅과 홍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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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병오의병의 진앙지 홍주 땅과 홍주성 전투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6.0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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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8>

30일 밤 동문근처 숲속 잠복 31일 기마병 폭발반 동문 폭파
홍주9의사 8월6일 대마도유배 감금생활, 이토히로부미 지시
이용규, 민종식 만나 재기추진, 이남규·충구 부자 체포 악형
홍주성에서 물러나 6월 6일 당진 소난지도서 항일투쟁 계속

 

▲ 홍주의사총에서는 해마다 홍주의병에 대한 제향을 지내며 넋을 위로하고 있다.

홍주성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잘 대응하면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5월 21일에 일본 경찰대에서 경부와 보좌원 순검 13명이 홍주성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하였지만, 의병 측에서는 대포를 쏘아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몇 차례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5월 27일 대대장의 지휘아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여 경찰과 헌병, 진위대에게 협조토록 훈령하였다. 이에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지휘 하에 보병 2개 중대(약 400명)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세하여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으로부터 약 500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에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던 것이다. 이때 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면서 일본군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처참하게 죽어갔다.

■홍주 9의사 대마도로 유배 감금생활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소모장 최상집, 좌익장 이상구, 참모 안항식, 돌격장 남규진, 참모 신보균과 이식, 서기 문석환, 그리고 우익장 신현두 등 9명(홍주 9의사)은 8월 6일(음력, 6월 17일)에 대마도로 유배되어 이즈하라(嚴原)에서 감금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대마도 유배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한편 홍주성 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을 비롯한 지휘부는 홍주성을 빠져나왔다.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재집결하여 부여와 노성지역을 행군하여 연산의 부흥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조병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전역에서 사망하였으며, 채경도와 오상준 등은 공주부에 감금되었다.
이용규는 그해 10월경에 예산 현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때의 지휘부는 대장에 민종식, 중군장에 황영수와 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이용규·김덕진으로 편제하였다. 이들은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이 포위하면서 습격을 당해 곽한일·박윤식·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이때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하여 박윤식·김덕진·정재호·황영수·박두표 등은 종신 유배형을 받고 지도(전남 신안군)로 귀향 갔으며, 홍순대와 김재신은 고군산도(전북 군산시)로 유배되었다. 한편 안병찬·박창로·최선재·윤자홍 등 수십 명은 공주감옥에 감금되었다.

▲ 지난 달 30일에 진행된 병오 홍주의병 장사공 순의 제110주년 제향모습.

■홍주성 함락 흩어진 의병들 항일전 계속
민종식은 미리 신창군 남상면의 성우영 집으로 대피하였다가 다시 공주 탑곡리 쪽으로 피신하였다. 일본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과 신창규를 체포하여 고문 끝에 민종식의 은신처를 파악하게 되었다. 결국 민종식은 11월 20일에 체포되어 공주부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1907년 7월 3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 처분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로써 예산에서의 의병 재기는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예산지역에서의 이와 같은 재기노력 이외에도 홍주성이 함락된 이후 각지로 흩어진 의병들은 부여·정산·당진 등지에서 항일전을 벌이면서 의병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우군관 홍순대는 1906년 11월 부여군 은산면에서 8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재기하기도 하였다. 또 남포의 성문에는 ‘의병대장 송’이라는 이름으로 친일관리인 군수 이철규(李哲圭)의 처단을 경고하는 방문이 나붙기도 했다.

■홍주성 패퇴 6월 6일 당진 소난지도 항일투쟁
한편 청양의 안병찬과 박창로, 면천의 이만식, 서산의 맹달섭, 전라도 출신의 강재천 등은 홍주성이 함락된 이후 정산의 칠갑산 방면으로 들어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안병찬과 박창로는 1907년 12월 일제 헌병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박창로는 300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있었다고 한다. 홍주의병의 유격장이었던 이만식은 당진·해미·대흥·서산·부여·공주를 비롯해 경기도 안성·용인 등지까지 진출하면서 활동하였다. 맹달섭은 박창로·이만식 등과 함께 칠갑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는데, 1907년 1월에는 70명의 의병을 이끌고 부여군 일세촌(日勢村)에서 일본인 3명을 처단하였다.
이후 그는 일제 군경의 추격을 피해 경기도 죽산으로 이동하여 윤필구 의병과 합세하여 광주·용인·안성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또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청양 출신의 김동락(金東洛)과 김무경(金武京)도 홍주성이 함락된 이후 정산·청양·부여 등지를 무대로 1909년 7월 일제 헌병에 체포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밖에 차상길(車相吉) 등 15명은 홍주성에서 물러난 뒤 6월 6일 당진 소난지도로 들어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밖에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박우일(朴禹日)·맹순량(孟順良)·이근주·한계석 등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1907~1909년까지 간헐적으로 항일전을 계속 수행하면서 의병전쟁의 파급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돌린 것은 의병뿐
이렇듯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이 전해지자 홍주지역 유생들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의병투쟁이 전게되기 시작했다. 청양의 안창식을 비롯해 청·일전쟁 직후 승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복한과 이설 등 홍주 출신 관료 유생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다.
이들은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의병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1895년 12월3일 홍주성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했던 것이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27개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으며, 송병직을 소모장으로 임명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이설·안병찬·이상린을 참모진으로 의병부대를 꾸렸다. 당초 이들은 공주부 공격을 계획했던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1895년 12월4일 지도부가 체포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한성재판소로 이송된 김복한은 유배 10년,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은 곤장 60대에 처해졌으나 고종의 명령으로 전원 사면 석방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의 산하는 또 한 번 울었다. 홍주지역 유생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의병으로 맞섰던 것이다. 을미사변 직후 홍주의병을 주도했던 안병찬·채광묵·박창로·이세영 등은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의병항쟁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때가 1906년 초였다. 안병찬은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며 의병을 모집했던 것이다. 이렇듯 죽음을 각오하고 시작된 홍주의병 투쟁은 1907년 5월 홍주성 점령과 패퇴를 거듭하며 절정을 이룬 가운데 1909년까지 간헐적으로 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의병전쟁의 불씨를 살리는 역할을 했다. 분명한 것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사건이 발발하자, 충청도지역에서 제일 먼저 의거(義擧)의 깃발을 올린 것은 홍주(洪州)에서였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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