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사운·엄찬고택 등 활용방안, 무엇을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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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사운·엄찬고택 등 활용방안, 무엇을 어떻게 할까?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7.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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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2>
▲ 장곡면 산성리 309(홍남동로 989-22)에 위치한 사운고택(士雲古宅) 우화정(雨花亭)은 양주 조씨 충정공파의 종가다. 당초 고택은 ‘조응식 가옥’이라 불렸으나 현재 ‘사운고택’이라 불리는 연유는 12대째 대를 이으며 고택을 지키고 있는 후손 조환웅 선생의 고종조인 조중세(趙重世, 1847~1898)의 호가 사운(士雲)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문화재 중요민속자료 198호로 지정됐다.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309(홍남동로 989-22)에 위치한 사운고택(士雲古宅) 우화정(雨花亭)은 양주 조씨 충정공파의 종가다. 당초 고택은 조환웅 선생의 부친의 이름을 따 ‘조응식 가옥’이라 불렸으며 국가문화재 중요민속자료 198호로 지정됐다. ‘사운고택’이라 불리는 연유는 조환웅 선생의 고종조인 조중세(趙重世, 1847~1898)의 호가 사운(士雲)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름 우화정(雨花亭)은 ‘꽃비가 내리는 정자’라는 뜻으로 조선 영조 때 문신인 자하 신위(1769∼1847)가 이곳에 머물 때 지었다. 8명의 정승을 배출한 350여년 된 양주 조씨 고택으로 조선말 동학농민전쟁과 6·25 한국전쟁 등의 소용들이를 겪었다. 고미당마을의 학성산 아래 반계천(안내 간판은 ‘무한천’이라 잘못 적고 있다)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나직한 야산이 감싸고도는 남향에 자리한 고택이다. 18세기 중반 조선 후기의 전통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옥고택으로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입구에 솟을대문과 ‘一자형’의 행랑채 뒤에 ‘一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왼쪽 끝에는 중문이 연결돼 있다. 중문을 들어서서 동쪽으로 돌면 ‘ㄱ자형’의 안채가 있고 동쪽에 안마당을 감싸며 ‘一자형’의 광채가 자리한다. 이와는 별도의 축으로 광채 뒤편에 ‘一자형’의 안사랑채를 배치하고 있는데, 담장을 두르고 대문을 따로 냈다. 안사랑채 왼쪽 뒷편은 안채와 통하도록 터놓았다. 안채에는 중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관행으로 사랑방을 두었다.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전통의 한옥고택이다.

이곳은 백제시대에는 왕이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얼라하’라고 불렸는데, 마을인구는 100여명 남짓인 전형적인 시골이다. 양주 조씨는 병자호란 때 산성리에 터를 잡고 첫발을 디딘 중추첨지부사 조태벽(1645~1719) 공으로부터 유래한다. 조태벽 공은 충정공 조계원(1592~1670)의 손자다. 조계원은 백사 이항복의 문인으로 인조의 계비인 장열왕후의 작은 아버지다.

또한 사운(士雲) 조중세(趙重世)는 문경현감 시절(1890~1892) 백성을 구휼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문경은 원래 농토가 적은 산골이어서 기근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더구나 기근이 들면 자체적으로 구휼미를 조달할 방법이 없는 가난한 고을이기에 조중세 현감은 자신의 본가인 장곡에서 곡식을 날라다 가난한 이들을 구휼했던 것이다. 이에 문경 사람들은 현감의 고마움에 공적비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운(士雲)은 1894년(고종 31) 홍주의병이 일어나자 239두(斗)의 곡식을 군량미로 아낌없이 내놓았다고 한다. 구한말 어수선한 나라의 정세에서 의병을 위해 선뜻 선비가 곳간의 빗장을 푼다는 것은 사운(士雲)이 아니고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운(士雲)의 그러한 나눔의 정신은 다음 대에도 이어졌다. 1930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조원대(趙源大) 선생이 이순신장군 묘역 성역화사업에 성금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나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금을 내놓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조원대 선생은 선대인 사운(士雲)의 뒤를 이어 나눔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특히 우화정은 6·25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사령부로 쓰였는데, 피난을 간 아버지 대신에 할머니가 집을 지켰음에도 화를 당하지 않았고 한다. 이러한 연유는 조환웅 선생의 할머니가 평상시 가난한 이웃에게 곡식을 나누고 마을에 산모라도 생기면 반드시 쌀과 미역을 보내는 등 온정을 베풀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안채의 할머니가 사시던 방에 ‘보현당(寶賢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고 한다.
 

▲ 성삼문의 둘째딸이 아들 엄찬을 데리고 살았다고 전해지는 홍북면 노은리 29의 ‘엄찬고택’ 전경.

홍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한평생을 농촌 부흥에 힘썼던 조환웅 선생의 아버지 조응식(趙應植·1929∼2010) 선생이 지은 ‘용진가’를 적은 노래비가 개울가에 있다. “학성산 정기로 반계천 맑은물 (중략) 검소와 근면을 행동에 옮기며 내 고향 일구자 (중략) 베풂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후략)”라는 노랫말의 의미는 ‘양주 조씨 집안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함은 물론이고 선비의 정신과 역사를 지니고 베풂을 실천하며, 전통을 지켜내자’라는 뜻이란다. 사운고택 우화정은 한때는 본채만 99칸에 달하는 명문부호였으나 현재는 60칸 남짓이 남았다. 지금은 12대째 대를 잇고 있는 후손 조환웅 선생이 살고 있는데, 초입에는 52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으며, 노신제를 지내던 나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친근하면서도 영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곁에는 250년은 족히 됐을 은행나무가 뿌리를 굳건하게 내리고 울창하다.

사운고택 우화정 입구는 여섯 칸 반짜리 대문채다. 왼쪽에 세 칸 반, 오른쪽에 두 칸이다. 그 가운데 솟을 대문이 위치하며 사운고택이라 적혔다. 사운(士雲)은 조환웅 선생의 고조부의 호인데, 구름 같은 선비란 의미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부엌 등이 있다. 윗방은 서쪽 바깥으로 나가는 복합문을 뒀다. 장독과 텃밭으로 오가기가 쉽다. 동쪽 협문의 안사랑채는 그 오른쪽이다. 행랑채와 사랑채 사이의 마당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한적하게 걷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행랑채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담장에는 대문이 하나 더 있다. 안사랑채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얼방문(乻方門)’이라 적혀 있다. ‘얼방’이란 글자를 보면 앞에서 말한 ‘반계천’ 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특히 이 마을은 백제가 패망한 뒤 의자왕의 아들 풍과 부흥군이 660년 이후 3년 동안 머물렀던 주류성이 고택 바로 뒤편에 있어서 원래 고을 이름이 ‘얼방면(乻方面)’이었는데, 현재는 그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싶어 고택 안사랑채(안사람들의 손님이 왔을 때 머물 수 있도록 한 집)에는 ‘얼방원(乻方垣)’을 대문에는 ‘얼방문(乻方門)’이란 편액을 붙여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얼(乻)’이란 글자는 중국 옥편에는 없는 새로 만든 글자로 임금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얼과 혼이라는 말 가운데 얼이 이에 해당하는 말로 이는 백제의 혼이자 곧 겨레의 혼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장곡면은 원래 오사면과 성지면, 얼방면으로 이뤄져 있었다. 얼방은 백제의 왕을 기리는 옛 지명을 기억하려는 의지임이 읽히는 대목이다. 특유의 선비정신이 배인 시각적 환희다.

■사육신 성삼문과 관련 있는 엄찬고택?
홍북면 노은리 29의 ‘엄찬고택’은 167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육신 성삼문 등 삼대가 멸하자 성삼문의 둘째딸이 아들 엄찬을 데리고 이곳에 내려와 친가의 묘역을 관리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이후 시간이 흘러 사람이 살지 않은 채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었고, 1996년 중요민속자료 제 231로 등록돼 있던 고택을 올해 홍성군이 매입했다. 성삼문은 외가가 있는 이 마을 노은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집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이 가옥이 그의 탄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이 가옥에는 원래 사랑채와 문간채도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안채에 붙은 익실, 중문간채만 남아있다. 안마당이 트이지 않고 사방이 막힌 ‘ㅁ자형’ 이다. 평면을 자세히 보면 ‘ㅂ자’ 모양이 거꾸로 배치되어 정면 쪽으로 날개부분이 빠져 나온 모습이다. 이러한 평면 구조를 ‘날개집’이라고 하는데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안채의 중심부에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했다. 대청 서측의 방 앞쪽으로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누다락을 만들어 안방에서 출입하도록 했다. 안대청의 서측 익랑은 길게 누다락을 설치하여, 하부는 광으로 쓰고, 상부는 다락방으로 쓰였다. 안대청의 동편에는 판벽으로 막아 곳간로 사용하도록 했다. 안채의 기단은 4자 이상으로 높여 남측 중문간채와는 단차가 심하다. 안채의 구조는 1고주 5량집으로 하고, 종보 위에는 표주박 모양의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안채의 북쪽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나머지 동서남쪽 부분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과 앞면이 사디리꼴 모양인 우진각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은 옛날대로 흙벽을 유지하고 있으며, 건물의 일부가 허물어졌으나 중요한 부분은 잘 보존돼 있다. 현재 안채를 제외한 사랑채나 부속 건물이 없어 전체적인 배치구성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가옥의 안채만으로 보면 충청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폐쇄된 배치구조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급하지 않은 입지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안채의 대지는 급한 구릉에 배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배치에 따라 안마당의 폐쇄감이 강하게 되고 안대청이 높아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대청과 지붕선을 맞추기 위하여 양 익랑까지 높아지게 되었다. 양 익랑이 높아짐으로써 마치 중층과 같은 형태가 되어 익랑에 누다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치와 건물구조는 충청지방에서 보다는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치와 구조라 하겠다. 현재 없어진 부분이 있어 전체적인 배치구조를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의 평면구조에서는 사랑채로 사용하는 공간이 아주 작아서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원래는 별도로 사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면에 작은 마당을 두고 그 앞에 횡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었을 것을 생각된다. 아무튼 홍성에 있는 고택을 중심으로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한 체험형·체류형 등의 관광상품 개발을 통해 내외국인의 관광객 유치를 통해 지역관광 활성화에 동참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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