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홍주성 전투와 일본군의 의병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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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홍주성 전투와 일본군의 의병학살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7.2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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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2>
▲ 홍주의병진은 광천을 지나 결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906년 5월 19일(음력 4월 26일) 홍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홍주의병들이 홍주성을 공격하자 홍주성 안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홍주성 북문을 통해 덕산 쪽으로 모두 도망갔다. 현재 홍성군에서는 홍주성 북문의 복원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문화재 발굴조사가 충남역사문화원에 의뢰해 진행 중이다. 오른쪽 표지석이 홍주성 북문터.

홍주목(洪州牧) 충청서부지역 관할 지방행정의 중심지
홍주성전투 12일 동안 홍주의병 900여명 산화 추정?
홍주성 일본인들 북문을 통해 덕산 쪽으로 모두 도망
유병장 유준근 일기, 의병 300명 순국한 것으로 기록


홍주는 충청도 서부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운주(雲州)로 불리다가 현종 3년(1012년)경에 홍주(洪州)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고, 현종 9년(1018년)에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가 확립되면서 충청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조선 태종13년(1413년)에는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세조 원년(1455년)에 지방방위조직을 재편하면서 충청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홍주는 지리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의 서쪽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그 주변지역과 혈연적· 학통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충청도 서부지역은 홍주를 중심으로 하나의 독특한 지역문화권을 형성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특히 세조 때 방위조직체제가 재편됨에 따라 충청도 서부지역의 방위권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특히 홍주지역의 유생들은 이단론(異端論)을 이념체계로 삼고 있던 한원진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한원진은 사람과 사물의 품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바탕으로 사람과 동물, 유교와 불교, 중화(中華)와 이(夷, 오랑캐)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이단배척론(異端排斥論)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의 척사론적 이단배척론은 홍주지역의 유생은 물론 전국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킬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이것이 홍주의병의 기본족인 봉기의 정신이며, 원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홍주의병, 5월 19일에 홍주성 공격
홍주의병은 남포성 승전을 기회로 홍주성 점령에 대한 자신감과 패기를 보이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홍주의병인 민종식의 의병진은 남포에서의 첫 승전을 계기로 다시 보령을 지나 광천(廣川)을 점령했다. 의병들은 광천을 점령하면서 생포한 일본인 6명을 상대로 본진이 주둔하던 남산에서 화살로 사형을 집행하면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정의를 가다듬으며, 이번 거의(擧義)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홍주의병진은 광천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5월 19일에 바로 홍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홍주의병들이 결성을 거쳐 홍주성으로 향했으나 홍주성 4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성벽은 높았다. 홍주성 안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홍주성 북문을 통해 덕산 쪽으로 모두 도망갔다. 홍주성에 도착한 의병들은 하수구로 두 병정 신문천(申文天)과 천학순(千學順)을 침투시켜 4대문을 열었다. 삼신당리에서 대항하는 적군을 일거에 격파하고, 대포를 앞세우고 홍주성을 포위하여 포화를 퍼부었던 것이다. 이들은 남문 성벽에 의지하여 대항을 기도하던 적군을 격퇴시키고 홍주성을 점거하였다. 홍주성은 그날로 의병들의 수중에 떨어졌던 것이다. 일본군은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에게 쫓겨 거류 일본인(日本人)을 수습하고 북문으로 빠져 나와 예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3월에 안병찬 의병진이 공격에 실패 한 홍주성을 민종식 의병진은 이와 같이 무난히 점거하고, 곧 홍주성 안에 있던 민중들을 안도시키는 한편 소를 잡아 피를 뿌리며 구국을 서약하기도 했다.
홍주성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내포지역의 유림 명망가들이 합류하고, 음양으로 지원해 왔다. 의병부대는 총포병 600명, 창병 300명, 그리고 유학자로 조직된 유회군(儒會軍) 300명 등 모두 1200명에 달하였다. 유생들의 부대를 위해 별도로 ‘유병소(儒兵所)’를 설치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장 민종식은 광무황제에게 을사5적과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의병이 이미 수의(守義)의 명분이 있으니 억지로 멸해서는 아니 되고 단지 타일러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지 말도록 지시하며 은근히 지원을 했다. 그러나 일제는 홍주성 함락 다음날인 5월 20일 공주의 이와다(岩田) 경부가 이끄는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동원하여 홍주성 안의 동정을 정탐하는 한편, 5월 21일에는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5월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키리하라 경시를 비롯하여 21명의 경찰이 홍주로 증파되어 왔다. 이들은 24일 공주진위대에서 파견된 관군 57명과 함께 의병을 공격했다. 의병대는 이를 물리쳤다. 이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홍주의병 해산의 특명을 내렸다. 하세가와는 27일 오후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이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로 급파했다. 경성 헌병대대 대위 이하 26명,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병력도 추가 파견했다.

▲ 홍주성 전경.

■홍주성, 5월 31일 일본군에 다시 점령돼
일본군은 1906년 5월 31일 새벽 2시 반 서문의 불빛을 신호로 총공격을 시작했다. 3시경 기마병 폭파반이 동문인 조양문을 폭파했다. 일본군 보병이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고 헌병과 경찰대가 뒤따랐다. 또한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도로 입구에 각각 1개 소대를 배치하여 의병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의병측은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들어왔다.
의병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방어했으나 일본군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오전 6시 민종식 등 약 100여명의 의병들은 홍주성을 탈출했다. 31일 오전 7시경 홍주성은 다시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이후 6월 7~9일경까지 약 열흘간 수색과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6월 14일 주차군 참모장은 학살 83명, 피체 154명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홍주의병의 유병장 유준근 일기에는 의병 300명이 순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주성 전투 직후 부임한 군수 윤시영(尹始永)은 일기에서 “의병 시신 83구를 매장했고, 또 목이 잘린 시신 15구를 찾아내어 6월 8일 매장했고, 사상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으며, 사방 수십리 지경 이내는 인적이 끊기고 잡힌 사람이 160여 명인데 모두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들으니 심히 참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결국 홍주의병은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한 이후 소규모 전투를 12일 동안이나 치렀다. 그리고 5월 31일 치열했던 수성전은 홍주의사총에 모셨다는 숫자만큼이나 많은 의병 900여명이 산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주성 함락 이후 살아남은 의병들은 해미·청양 등지로 탈출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항일전을 벌였다. 민종식의 처남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군 유치(杻峙)에서 군사 400명을 모은 뒤 연산 부흥리(富興里)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뒤 이용규는 1906년 10월경 예산군 한곡(閒谷), 현 대술면 상항리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 1855~1907)와 그의 집에 피신해 있던 민종식 등을 만나 예산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이남규가 민종식을 숨겨주고, 홍주지역 제3의 항일의병 구심점이 되는 듯하자 1907년 9월 26일, 기마병 100여명을 동원하여 예산 대술의 이남규 집을 급습하였다. 이남규는 일본군이 포박하려 하자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可殺不可辱)”며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서울로 압송해 가던 일본군은 이남규를 회유하여 귀순을 강요하였으나 완강하게 거부하자 온양 근교 평촌(坪村)에서 이남규와 그를 따르던 장자 이충구와 함께 가던 하인 김응길(金應吉)을 무참히 살해했던 것이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칠갑산·해미·대흥·서산을 비롯하여 당진 소난지도, 경기도 안성·용인 등지에서 투쟁을 계속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대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조선 유학자들의 정신은 이렇게 식을 줄 모르고 홍주 땅에서, 홍주의병 항쟁에서 불타올랐던 것이다.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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