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기 꽂힌 홍주성, 피비린내로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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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기 꽂힌 홍주성, 피비린내로 물들다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8.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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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3>
▲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은 홍주성에 창의기를 높이 꽂고 대오를 정비하면서 본격적인 수성에 들어갔다.

의병들 홍주성에 창의기 꽂고 열사흘간 백병전으로 맞서
홍주의병진과 일본군 홍주성 전투에서 처절한 싸움 벌여
일본군, 삼광작전으로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고자 발악
의병지도자들 만주·연해주로 이동 독립군으로 투쟁 전개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은 홍주성에 창의기를 높이 꽂고 대오를 정비하면서 본격적인 수성(守城)작업에 돌입했다. 성을 점령한 이후 의병진을 개편한 민종식 의병장은 5월 31일 홍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어 패퇴할 때까지 연일, 혈전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일본군들이 홍주성을 빼앗기고 난후 다음날부터 홍주성 탈환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전하는 의병진에게 여러 차례 격퇴당하고, 더구나 10여명의 포로까지 생겨나면서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재경성남부수비사령관 홍죠(本條)에게 명령하여 포병, 기병, 헌병의 일부 및 보병 2개 중대를 서울에 급파시키고, 여기에 다시 홍주, 공주, 진주의 관군(官軍)진위대 병력과 그곳의 일본군을 모두 홍주성 탈환작전에 투입하였다. 무기 면에서나 병력면에서나 의병보다 우월한 조건을 갖춘 일본군은 5월 25일부터 집중 공격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병들은 성민(城民)을 동원하여 성벽을 수축하고 작전 부서를 다시 정비하여 그들과 혈전을 거듭 하였다. 이런 가운데 5월 30일은 온종일 공방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5월31일 새벽 일본군들은 화력을 동문에 집중시켜 성문을 파괴 시키고 물밀듯이 밀어 닥쳤던 것이다.
 

■창의기 꽂고 열사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결국 5월 31일 새벽 2시 30분,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이 깨지고 말았다. 홍주성을 홍주의병들이 점령하고 창의기를 꽂은 지 열사흘 만에 일본군에 의한 최대의 불길한 징조였던 것이다. 조양문이 깨지는 순간 홍주성 안에서는 처절한 전투가 2시간여 치열하게 벌어졌다. 한 밤중에 기습을 당한 의병들은 백병전으로 소총과 대포를 쏘며 성으로 진입한 일본군을 격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동문이 무너져 급히 달려갔으나 벌써 일진회원 100여명과 일본군 381명이 앞장서 들어오고 있었다. 성에 올라가보니 상황이 아주 급하다. 군사를 끌고 나가서 일당백으로 응전하여 적 400여명을 모두 죽였다. 그러나 적의 탄환이 비가 오듯 했다. 어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창고에 가서 탄환을 가져오는 동안에 적의 대부대가 밀려 들어왔다.’고 〔의사 이용규전〕에 당시의 혈전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는 일본 측의 기록에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성이 부서졌다. 앞서 있던 보병들이 기관포를 계속 쏘면서 돌격하고 헌병대가 뒤를 따랐다. 경찰대는 후속부대였다. 이 순간 성루에서 쏘아대는 대포와 소총의 탄환이 싸라기가 쏟아지듯 하였다. 적(의병)들은 진퇴로를 잃고  맹목적으로 쏘아대는 한밤중의 포성이 우리(일본군)의 함성과 범벅되어 처절하기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홍주의병진과 일본군은 홍주성 전투에서 처절하리만큼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이로써 홍주성 전투는 의병들이 일본의 헌병이나 경찰, 조선의 진위대 등과 싸운 것만이 아니라 일본의 최정예 정규군인 일본군과 맞붙은 전투로 당시 의병과 일본군이 맞붙은 국가 대 국가 간의 전면전을 벌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물론 비정규군인 의병들의 희생은 엄청났지만 말이다. 따라서 홍주의병진은 홍주성 방위를 위해 최후의 백병전을 전개하고도 패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참모장 김상덕을 위시한 의병진이 용전분투하였지만, 80여명의 전사자가 생기고 80여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이로써 의병진의 대열이 무너졌던 것이다. 따라서 민종식 등은 후일을 기약하고 홍주성을 넘어 패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 기록에 의하면 이때 의병측은 일본군병사 10여명을 사살하고 생포자 4명을 총살 했으나, 의병 측 전사자는 군사 김상덕, 채광묵, 성재평,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 등 138명이었고, 윤석봉, 이상두, 신현두, 유준근 등 145명이 체포되었다고 전해진다.

홍주성에서 패전한 민종식 의병진은 이후 재기하여 항전을 계속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홍주성을 탈출한 홍주의병의 지도층은 농부 혹은 행상으로 가장하여 다니다가, 그해 7월에 이용규를 중심으로 청양에서 군병을 수습하였다. 이때 재집결된 군사는 40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의병진이 다시 행진하여 부여 노성을 지나 연산 부흥리에 이르렀을 때, 다시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역시 패퇴하였다. 전투 훈련이 부족한 부대였고, 더욱이 무기가 열세였기 때문이다. 이후 홍주의병진은 그해 10월에 예산에 집결하여 항전을 시도하고자 이용규, 곽한일, 박윤식, 김덕진, 김운락, 황영수, 정회규, 박창로, 이만식 등이 중심이 되어 민종식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여 준비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처 출동 준비가 완료되기도 전에 일진회원들에 의하여 발각되고, 이어 그들이 인도해 온 일본군경 합동수색대에게 민종식 이하 주동인물이 거의 체포되어 큰 계획은 좌절 되고 말았다. 이후 홍주의병은 충청도와 전라도 각지에 흩어져 혹은 100여명의 단위부대로 활동하며, 1907년 8월 전국적인 의병 항일전이 전개 될 때까지 꾸준히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또한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을 단행하면서 이때 흩어진 군인들과 의병진이 합세한 거국적인 투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서울근교에서는 1만여 명의 의병군이 진군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전국의 농민과 노동자, 상인들도 의병에 가담하여 거병하자 일제는 잔인한 만행으로 보복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 일대에서는 양민을 학살하고 원주에서는 의병들의 배를 가르며 살갗을 벗기는 악행을 자행하기도 했다. 또한 구덩이에 반신을 묻고 목을 베기도 했다. 황해도 평산에서는 남녀 수백 명의 옷을 벗겨 얼음 위에서 얼어 죽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은 5월 31일 새벽 2시 30분경 일본군에 의해 문이 깨지고 말았다.

■조국 광복을 위해 피나는 투쟁 전개
1909년 마침내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군 의사의 총탄에 쓰러지자 일제의 잔학행위는 ‘남한 대 토벌작전(南韓 大 討伐作戰)을 전개하면서 이른바 포악하기 그지없는 삼광작전(三光作戰, 殺光:모두 학살한다, 燒光 : 모두 불사른다. 奪光:모두 약탈한다)으로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고자 발악하였던 것이다. 대량학살의 난국 속에서 의병운동은 이제 새로운 독립운동의 전기로 발전되었다. 의병 지도자들은 후일을 기약하고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무장 독립군으로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말 의병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국권회복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칼과 창, 돌팔매 등 백병전으로 일제와 맞서며 목숨을 바쳐온 조상들의 순국대의 정신은 곧 우리의 민족정신의 발로로 후세의 민족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당시 의병 투쟁은 조선팔도의 전 국민이 봉기한 거대한 구국전쟁으로써 가장 치열했던 1901년과 1908년 기간 중에는 한 달 사이에 전국적으로 270여회의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의병들은 유림 출신이나 군대 출신 또는 농민출신을 막론하여 신분과 학식의 고하를 불문하고 일제와 맞섰던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자발적 항쟁과 의병정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항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고, 1920년부터 광복의 날이 올 때까지 끈질긴 항쟁을 벌였던 독립군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반세기에 걸친 근대 항일 민중운동사에서 이 의병운동은 독립투쟁에 활력을 불어 넣었고, 민족사에 자주자립의 정신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특히 분연히 봉기하였던 홍주의병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자존과 국권 회복을 위해 스스로 앞장서서 최후의 1인까지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조상들의 숭고한 민족정신은 오늘날까지 대전·충남지역에서 57명(대전 3, 공주 4, 보령 5, 서산 1, 아산 3, 세종 1, 논산 3, 부여 5, 서천 2, 청양 13, 홍성 9, 예산 3, 당진 2, 불명 3)의 의병항쟁 독립 유공자를 배출함으로써 우국충절의 고장인 홍주 땅과 홍주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다.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정신과 의식 속에는 선열들의 끓는 피가 용솟음치고 있음을 자각시켜 주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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