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중심인물 9명 대마도에 유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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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중심인물 9명 대마도에 유폐시켰다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8.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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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4>
▲ 홍주의병들이 유폐되었던 일본 대마도의 이즈하라항 전경.

홍주의병, 충남서부지역 항일세력 대규모 결집 집단 형성
이토 히로부미, 광포하고 잔인하게 홍주의병 탄압을 자행
홍주의병 9명, 사형을 종신형으로 낮춰서 대마도로 유폐
홍주 9의사 대마도 유폐 20일, 호남의병장 최익현도 유폐

 

충청도 홍주(洪州)에서는 1906년 봄에 전 참판 민종식을 주장으로 삼고 의병이 일어났다. 김복한과 안병찬 등을 주축으로 일어난 전기의병의 전통을 이어 을사조약 늑결 이후 항일의병이 재기하였던 것이다. 홍주의병은 중기의병을 상징할 만큼 규모도 컸고 또 전투도 격렬하였다. 홍주의병은 충남 서부지역의 항일세력이 결집된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양과 홍주를 중심으로 예산·부여·남포·보령 등지의 항일세력이 대거 결집된 형태였고, 청일전쟁 후 퇴거해 있던 전 참판 민종식이 이들의 주장이 되었다.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한 뒤 5월 31일 성이 실함될 때까지 홍주의병은 왕성한 기세를 과시하며 일제 군경의 공세를 훌륭히 차단해냈다. 일제는 ‘한국주차군’이라 부르던 자국 군대를 동원해 홍주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홍주의병에 대한 강력한 탄압방침 실행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 된 이후 의병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등 항일투쟁의 열기가 급격하게 고조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러한 기세를 진정시킬 방안을 절박하게 마련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일제의 의병 대마도 유폐계획은 을사조약 늑결 이후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나왔고, 통감의 정책적 판단과 필요에 의해 단기간에 수립·추진된 것이었다. 일제가 의병 유폐계획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06년 5월 말 홍주의병을 와해시키고 그 중심인물들을 서울로 끌고 온 직후, 곧 1906년 7월 초순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확인되는 자료상 의병의 대마도 유폐계획을 최초로 언급한 문건은 1906년 7월 11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보낸 전보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수립한 홍주의병의 처리안건을 각의에 제출해 줄 것을 요청한 전문(電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회 폭도 수령으로 지목한 자로서 사형에 해당되는 자 5명 정도 있음. 이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외관상 가혹이 지나치다고 우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음. 본관은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협의한 후 사형을 감하여 종신감금으로 선고하고 이들을 대마도에 배치하여 동도(同島)수비대의 감시 하에 감금할 것을 희망함. 지금 이들을 한국 정부에 맡겨 그 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어서 아라비 파샤를 콜롬보에 유배한 고례(古例)를 본받으려 한 것임. 이 일은 군법을 위반한 예에 속하므로 감히 각하께서 번거우시더라도 임기응변에 머물지 않을 수 있게 조치하도록 각하께서 내각에 제출하시어 가부의 명령의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함”이라는 전문을 보냈던 것이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곧 광포하고도 잔인하게 자행된 홍주의병 탄압에 대한 비난여론을 의식하여 이를 무마하기 위해 ‘사형에 상당하던’ 홍주의병 5명을 종신형으로 낮추어 이들을 자국의 대마도로 끌고 가 철저히 유폐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을사조약 늑결 이후 점차 확대되어 가던 항일투쟁을 탄압하는 데 전력을 경주하고 있던 통감은 전국 의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던 홍주의병에 대해 강력한 탄압방침을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체포된 중심인물들에 대해서는 여타 의병의 경우와는 달리 대한제국 정부에 처리를 맡기지 않고 자국인 대마도로 끌고 가 유폐시킴으로써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직접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통감은 대마도 의병 유폐가 임기응변에 따른 일시적 조처로서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육군대신을 경유하여 그 안건을 각의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사실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홍주의병에 대한 처리방안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영국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이집트 민족운동의 영웅인 아라비 파샤(Arabi Pasha, 1839~1911)를 멀리 실론 섬으로 유폐한 사실에 착안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황은 이후 홍주의병의 유폐와 관련된 일제의 다른 문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 백제의 비구니가 창건했다는 일본 대마도의 수선사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 면암은 이 곳에 유폐돼 순국했다.

■홍주의병 일본 대마도로 유폐 고초 겪어
1906년 5월 31일에 벌어진 홍주성 공방전은 중기의병 시기의 항일전 가운데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전투로, 의병 탄압에 일본군대가 최초로 투입된 전투이기도 하였다. 5월 31일 새벽 홍주성이 실함된 뒤 154명 이상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그 가운데 중심인물로 분류된 78명은 서울로 끌려갔다. 이들은 헌병 5명이 감시하는 가운데 6월 7일 홍주를 떠나 예산 신례원과 온양을 경유한 뒤 6월 9일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당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 한국주차군사령부에 구금되었던 것이다. 이들 홍주의병은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은 후 7월 17일(음 5월 26) 모두 77명 가운데 16명이 일제로부터 이른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의병은 30~50대의 태를 맞고 석방되었다. 이때 ‘징역형’을 선고받은 16명의 명단과 ‘형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유준근(柳濬根, 홍주의병 유병장)·이식(李侙, 홍주의진 참모)·남규진(南奎振, 홍주의진 돌격장)·신현두(申鉉斗, 홍주의진 우익장): 무기, △이상두(李相斗, 홍주의진 좌익장):15년, △최상집(崔相集, 홍주의진 소모장): 5년, △문석환(文奭煥, 홍주의진 서기): 4년, △신보균(申輔均, 홍주의진 참모): 3년, △안항식(安恒植, 홍주의진 참모): 1년, 그리고 △박규(朴珪)·이동근(李東根) 등 7인: 3삭의 형량을 선고했다. 이렇듯 홍주성 실함 이후 일제는 홍주의병의 중심인물 9명을 대마도로 끌고 가 유폐시켰다.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 부른다.

일제가 이와 같이 홍주의병 9의사에게 선고한 ‘형량’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재판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구체적인 경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항일전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과, 40여일 갇혀 있는 동안에 일제가 판단한 각인의 반일사상의 정도와 수감태도 등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항일전 과정에서 수행한 각인의 역할은 ‘형량’에 가장 큰 고려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외관상 그 기준도 일정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항식과 신보균은 직책이 같은 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형량에는 상당한 차이가 났다. 또 참모사였던 이식도 이들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무기형을 선고받았던 것이 그 예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7월 11일 이후 약 한 달간에 걸친 대마도 유폐계획이 마무리되자, 일제는 계획된 각본에 따라 8월 7일(음 6월 18일) 홍주의병 9명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5명의 헌병이 감시하는 가운데 당일 오전에 남대문을 나와 용산 정거장에서 기차를 탔다. 이때 유준근의 형제인 유태근(柳台根)과 유홍근(柳洪根), 안병찬의 아들인 안석로(安奭老), 최익현의 아들인 최영조(崔永祚) 등이 배웅하며 눈물을 뿌렸다. 서울을 떠난 홍주의병은 당일 저녁 초량에 도착하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곧 배에 올랐다. 이들이 탄 배는 야간 항해를 한 끝에 다음날인 8월 8일 새벽 대마도 엄원항(嚴原港)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의병들은 선두에 섰던 일본 헌병들에 끌려 하선한 뒤 일본인 시마오 장개(島雄莊介)의 사가(私家)인 잠상실(蠶桑室)에 수용됨으로써 바로 유폐생활에 들어갔다. 서울을 출발하여 유폐지 대마도에 도착할 때까지 의병들의 ‘호송’ 책임은 한국주차군사령부에 있었다.

그리하여 홍주의병의 이동과정에는 5명의 헌병이 동행하여 이들을 철저하게 감시하였으며, 대마도 도착 즉시 대마경비보병대대에 신병이 인도됨으로써 이후 의병들에 대한 ‘감시’ 책임은 대마경비대로 이관되었다. 홍주 9의사가 대마도로 끌려간 지 20일이 지난 1906년 8월 28일에는 호남의병장 최익현(崔益鉉)과 그의 핵심 참모인 임병찬(林炳瓚)이 추가로 대마도에 유폐되었다. 이에 따라 홍주의병 9의사와 최익현·임병찬 등 11명의 의병은 적국인 일본의 대마도로 끌려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갖은 고초와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일본군에 맞서 싸운 홍주의병항쟁에 앞장섰다가 붙들려 대마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홍주의병 9의사. 이들 의사들은 단식투쟁, 일본 옷 입기 거부 등 강력히 저항하였고 그들보다 2여일 늦게 유배돼 온 최익현·임병찬과 더불어 더욱 강하게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중 최익현은 5개월여 만에 순국하였고, 나머지 의사들은 유배생활 내내 줄기차게 저항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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