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이면 씨름판 벌어져 소 한마리 끌고가던 내고향 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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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이면 씨름판 벌어져 소 한마리 끌고가던 내고향 광천
  • 글=장나현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8.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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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13>

서울예술대학교 김영동 교수

유년시절 보고 자란 광천 장날 작품에 도움
전통화 현대 조화를 이뤄 국악 대중화 앞장 
우리음악은 슬프면 바로 표현하는 직관음악
뉴 그로브 음악사전 등재 세계 국악 작곡가 

▲ 김영동 서울예술대학교 한국음학과 교수가 편종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영동 교수에게 인터뷰 요청 차 전화를 했을 때 본인은 홍성 사람이 아닌 한사코 광천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기억하는 광천은 어떤 곳일까. ‘어디로 갈꺼나’, ‘삼포 가는 길’로 누구나 쉽게 국악을 접할 수 있도록 국악의 대중화를 이끈 국악 작곡가 김영동 교수를 그가 재직 중인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만났다. 

“광천 장날은 신나는 잔치 날이였죠. 태평소 소리 울려 퍼지면서 씨름판이 벌어지고 방울 소리 나는 소 한 마리 끌고 가고, 광천고 형들이 밴드부 행진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가 6남매 중 다섯째 였는데 어머니 젖이 안 나와서 동네 아주머니 젖을 3살까지 먹었던 기억도 나고… 그 아주머니가 양지바른 곳에서 젖을 먹여주면서 노래를 해주던 모습들. 광천하면 화려한 모습들과 포근하고 아련했던 모습들이 함께 떠오르죠.”

▲ 이농삼화.

김 교수의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일가족이 광천으로 피난 왔다. 피난 당시 어머니 뱃속에 김 교수가 자라고 있었다. 1951년 광천읍 읍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광천 오거리 근처에서 양복점을 크게 냈는데 양복점 앞에 항상 광천극장의 포스터가 붙여있었다. 포스터를 양복점에 붙여주는 대신 극장에서 표를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 

광천극장은 창극도 공연할 정도로 번화된 곳이었다. 극장이 잘 돌아가 공연팀을 초청하고 창극을 공연하는데 주인공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면 영상도 낭떠러지였다. 유년시절 봐왔던 영상은 훗날 그의 공연에 처음으로 영상을 도입할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 마을사람들이 전부 의용소방대원 이었던 모습도 기억에 남고 현재 광천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고 연락 되는 사람이 없어 무척 아쉬워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에 끼가 많아 초등학교에서 노래대회에 나가면 항상 입상을 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작품 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도시 생활만 했으면 장날 분위기를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어릴 때 보고 경험 했으니 알고 있죠.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광천 읍내에서 조금만 비껴가면 냇가가 있었어요. 저는 그래서 읍내에서 문화도 즐기고 냇가에서 고기도 잡는 두 가지를 전부 경험해봤죠.”


5학년 때 용산의 한강 초등학교에 전학을 가고 당시 국악을 나라에서 육성해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중고등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국악을 시작한다. 판소리 박동진 선생을 비롯한 유명 인간문화재들이 연습하고 있었고 그 밑에서 국악 전반적인 것을 배우고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에 진학한다. 중고등학교 때 모두 배웠던 것을 대학에서 똑같이 배우자 김 교수는 직접 창작을 하기에 이른다. 

▲ 의정부

“서양음악을 작곡한 친구들이 국악기를 써서 작곡한 곡을 들어보니 곡을 이렇게 밖에 못 쓰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작곡을 하게 되었지요. 오태석 선생의 이식수술이라는 모노드라마에 음악을 맡아 습작식으로 처음 작곡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국립국악원 현판에 ‘국악대중화’라고 붙여있었다. 국악원의 지상 최대의 과제는 국악의 대중화였다. 김 교수는 국악을 대중화 하려면 다양한 장르의 매체와 접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도 있었지만 70년대 영화 환경은 열악했다. 당시는 연극이 종합예술이었다. 

김 교수는 특별히 애착가는 작품으로 단군신화를 꼽았다. 국악관현악 중 단군신화라는 작품이 있다. “단군신화는 일주일 만에 한 호흡으로 썼지요. 그런 작품이 좋은 것 같아요. 머리 속에 꽉 들어왔을 때 한 호흡으로 한곡을 쓰는 거죠. 머리속에 충분히 단군에 대한 이야기를 넣어놓고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면 그림이 다 나오거든요.” 

지상 최대의 목표라는 국악의 보급화를 위해 대중적인 음악을 했더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 전통음악을 망친다며 국악계에서 냉대를 당했다.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황석영 희곡 ‘장산곶매’의 매굿을 썼다. 이 곡으로 그는 대한민국 작곡상에 출품해 우수상을 수상했다. 

▲ 아침을 두드리는 소리.

김 교수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로 불국사에서의 공연을 꼽았다. “불국사 경내 석가탑 다보탑을 사이에 두고 천년의 소리라는 공연을 기획하고 연주한 기억이 너무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다보탑 뒤에서 연주하고 불국사 지붕에 조명으로 구름을 흘러가게 하고 연주했었지요. 역사의 흐름이 내 몸 속으로 막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야외에서 벅찬 공연을 마치고 다음부턴 실내 공연이 재미가 없다고 한다. 마치 석가탑 다보탑의 전설이 내 몸속에 들어와 내가 연주를 했던 것처럼 느껴졌다고. “바람의 소리라는 훈으로 된 악기를 연주했을 때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어. 아마 그 기억은 평생 못 잊을 겁니다.”

반면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지 묻자 우리가 우리의 것을 너무 모르고 당연시 하고 어렵다고 이야기한 때라고 한다. 특히나 관공서에서 우리문화를 도외시 하고 가치를 귀하게 생각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 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 것이 마냥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김 교수는 강조한다. 서양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선 아주 추종하고 전통음악은 아니라고 생각는 게 가슴이 아프다고 이야기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아이들에게 계속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이다.

▲ 국악원

김 교수는 요즘 지사님들 붓글씨 쓸 줄 아는 사람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 폼으로 쓰는 게 아냐. 어느 경지에 가려는 수련이라며. “안희정 지사에게 부탁하는데 붓글씨부터 배우라고 말하고 싶어요.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정도를 해야 보수라고 할 수 있지요. 하나도 안하면 지도자가 무슨 정체정이 있겠어요. 없죠. 적어도 그 정도를 받아들이는 식견이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문화에 대해 일반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부탁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그냥 느끼고 행복을 찾으면 우리것에 대해서도 행복을 찾을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전통적인 삶이라는 게 뭐예요? 지금 우리 삶 속에도 남아있어요. 가까운 예로 음식 된장 같은 것을 담는데 서양음식은 아니잖아요. 된장이 뭐가 어려워요. 똑같은 거죠. 전통음악이 왜 어려운건가요.”

서양음악과 우리음악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서양음악은 클라이막스로 가기 위한 과정을 많이 설명을 하는 거고 우리 음악은 직관적이지죠. 우린 슬프면 바로 아이고 나오잖아요. 자 나 뭐 한다 한다 이러다가 아이고 나오지 않아요. 서양음악은 어떤가요. 슬프면 슬픔을 만들어 가려고 막 하잖아요. 우린 바로 나오는 그런 차이가 있죠. 근데 그걸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이야기 할 수 없어요.”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20년마다 한 번씩 등재되는 ‘뉴 그로브 음악사전’에 등재됐다니 국악으로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 하고 보람 돼죠. 김용섭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생의 황금기는 65세에서 75세라고 했는데 내가 65세 되었으니 앞으로 10년을 내가 뭐 할건가. 그 양반 글귀 때문에 내가 희망을 가졌어요.”

▲ 토지

김영동 교수는…
한국전쟁당시 광천으로 피난 와서 12살 때까지 광천 읍내에 살았으며 이후 서울로 이사해 국악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과 국악 전공, 괴팅겐게오르크아우수스트대학교 비교음악을 수료했다. 수상내역으로 1976년 한국연극영화대상 음악상, 1980년 대한민국무용제 음악상, 1981년 대한민국 작곡상, 1985년 대종상 음악상, 1994년 제39회 아태음악상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경력사항으로는 1979년 국립국악원 연주단원, 1990년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1993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2005년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관현악 작곡으로는 1984년 개벽, 1988년 아니리, 1989년 단군신화, 1990년 신수제천 등이 있으며 먼길, 김영동 대금연주집, 선(禪), 삼포로 가는 길 등 15장의 국악 앨범을 발매했다. 또한 2014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 음악을 작곡(고은 작시 조수미노래)한 바 있다. 2000년 뉴그로브 음악사전에 세계의 작곡가로 등재됐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한국음악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공연 및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글=장나현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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