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의 청빈한 청백리 삶이 묻어나는 맹사성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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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상의 청빈한 청백리 삶이 묻어나는 맹사성 고택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0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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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5>
▲ 맹사성 고택의 전경. 고택 오른쪽에는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孟裕), 아버지 맹희도(孟稀道), 그리고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世德祠)가 보인다.

최영 장군 아버지 최원직이 지은 집,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
정면 4칸 측면 3칸의 공(工)자형 평면집인 아담한 북향의 기와집
기둥과 도리 사이 봉설(봉황의 혀) 장식, 내실 천정은 소라 반자
구괴정, 영의정 황희·우의정 권진·좌의정 맹사성 국정 논의한 곳

 

무릇 집이라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의 철학과 원형질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공간이다. 살림살이의 규모가 곧 사회적 지체를 말해 주던 옛 전통사회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낮추며 살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물신(物神)에 잡혀 각종 비리와 뇌물수수로 쇠고랑을 차야 될 철면피하고도 부도덕한 선량들이 버젓이 활보하는 썩고 부패하여 병든 사회, 공직자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자기 이기적인 물욕(物慾)에 젖어 민원을 팽개치며 꼼수로만 가득한 사회, 주민들의 민생보다는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며 공직자임을 스스로 외면하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며 사회현상이다.

이러한 우리의 사회현실에서 ‘눈 맑고 가슴 맑았던 옛 선현의 삶’이 그리워지는 건 결코 새삼스러울 일이 아닐 것이다. 청빈을 몸으로 실천하며 올곧게 80평생을 살다간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가난했지만 청빈했던 옛집을 찾아가 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숭고하리만치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갖는 일이다.
 
 

▲ 맹사성 고택에서 담장 밖으로 나가면 맹사성, 황희, 권진 삼정승이 각각 느티나무 세 그루씩을 심고 세운 정자 구괴정(九槐亭)이 있다.

■ 대표적 고려시대 살림집 ‘청빈의 상징’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은 1360년 충청도 땅 온양에서 태어났으며,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386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세종대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맹사성이 청렴한 청백리로 살아온 상징적 터전인 아산시 배방읍 중리 480~4의 ‘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수백 년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집으로 꼽히고 있다.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 맹사성에게 그의 집을 물려받게 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고택은 고려 말의 명장 최영 장군의 아버지인 최원직이 1330년(고려 충숙왕17)에 지어 살다가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에게 물려 준 것인데, 그것이 직접적인 인연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됩니다. 최영 장군이 맹사성의 처할아버지”라는 것이 이순옥 해설사의 설명이다.

고불 맹사성이 거처했던 고택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깜짝 놀랐다. 전국 각지의 고택들을 방문해봤지만, 집을 지은 최영 장군이나 이 집에서 살아온 정승을 지낸 맹사성의 고택이 이토록 소박할 수 있을까. 오늘날 공직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왔거나 살아가는 선량들에게 던지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가슴팍을 깊숙이 파고든다. 하지만 맹사성의 고택은 정승의 품격에 걸맞지 않을 만큼 정면 4칸, 측면 3칸의 ‘공(工)’자형 평면집인 아담한 기와집이다. 중앙에 2칸 대청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왼쪽에 한 칸씩의 작은 온돌방을 둔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살림집이다.

건축재며 문창호(窓戶)등은 작지만 튼실한 고법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조선조 성종·인조·순조 때와 1929년 각각 중수한 기록이 있는데 애초 딸려 있었던 부엌채와 헛간채, 사랑채는 없어졌다고 한다. 맹사성이 세종 때의 권신으로 당대의 명재상 황희, 윤회, 권진 등과 가깝게 지내던 처지였던 터라 살림을 늘렸을 법도 한데, 맹사성은 오로지 나라에서 주는 녹미(祿米, 월급으로 주는 쌀)로만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대 이후에도 감히 그의 강직하고 고결한 품성을 쉬 누르지 못해 옛적의 단출한 모습 그대로를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방 고을의 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고택들도 수십 칸에 달하는 저택을 소유한 사례가 많은 것을 되짚어보면, 소박한 고택에서 그의 청백리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큰 수확이다.

하지만 맹씨 가문의 화려했던 옛 영화만큼은 거대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고고하게 대변해주고 있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면 고불 맹사성의 청백리 정신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택의 목재는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생활의 흔적을 오롯이 담고 있는 듯 그을렸으며,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장식되었다. 내실의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로 지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맹씨행단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사성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이라 한다는 설명이다. 맹사성은 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었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고택의 역사적 의미 또한 남다르다. 고려시대의 건축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으로서 ‘ㄷ’자 형태와 ‘공(工)’자형태가 결합된 고택이다. 또 이 고택은 독특하게도 북향(北向)으로 지어졌는데, 아마도 임금이 계신 한양이 북쪽이라 그곳을 향해 지었을 것이라고. 이곳이 ‘맹씨행단’이라 불리는 이유는 맹사성의 부친인 맹희도가 은둔하며 후학양성에 매진하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맹사성의 부친이 후학을 가르쳤던 흔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오간데 없지만, 영조의 친필 어제 사액인 ‘행단(杏亶)’이 고택 입구의 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기념관에는 맹사성의 유품인 호패, 금동연화반, 금동연화잔, 그리고 갓끈 등이 남아있지만 아쉽게도 방문객들에게 상시적으로 공개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산시에서 현재의 기념관 건너편에 새로운 기념관을 세우고 있으며,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 기념관이 완공되면 머잖아 맹사성의 유품들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다.


■맹사성, 물욕 경계 정신적 행복추구 관심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하나였던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孟裕), 아버지 맹희도(孟稀道), 그리고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에도 청백리 정신은 묻어나고 있다. 사당이라 불리기에 민망할 정도로 아주 작은 규모로 소박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맹사성의 청백리정신을 해칠까 봐 후손들께서 너무 조심하다 보니 이토록 단출한 사당을 지어놓은 듯싶기도 하다. 한편 맹사성 고택에서 담장 밖으로 나가면 맹사성, 황희, 권진 삼정승이 각각 느티나무 3그루씩을 심고 정자를 세우니, 이름이 구괴정(九槐亭)이다. 맹사성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던 구괴정은 오늘도 객들을 맞고 있다.

청렴결백했던 맹사성도 구괴정 만큼은 한껏 사치를 부렸나 했더니 동행한 이순옥 문화관광해설사가 얽힌 사연들을 설명해주었다. “구괴정을 살펴보시면 선생의 고택에 비해 화려하게 지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맹사성의 청백리정신을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이 정자는 고불 선생이 혼자서 건립한 건물이 아닙니다. 세종대에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권진과 함께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이 합력해 건립한 정자입니다. 삼정승이 지었다 해서 삼상당(三相堂)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보시다시피 풍광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정자가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으로서 마을주민들을 위로하는 공간이기도 했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쉼터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사성은 시문에도 능했고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만들 정도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효성도 극진했던 효자였다고 한다.

맹사성을 비롯한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물욕을 경계하면서 정신적인 행복추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해 있지도 않았고, 물질적 권위를 뛰어넘는 정신적 가치와 신분적인 위계질서에 체면에 대한 욕구가 선비들을 물질적 탐욕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보호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 고택은 지금 맹사성의 21대손인 맹건식(孟健植·80), 성낙희(成樂喜·80) 두 종손부부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울어가는 행단을 지키고 있다. 종부인 성낙희 할머니는 “힘들어도 우리 힘만으로 지켜나가는 게 선조할아버지의 정신을 받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택은 보존 보다는 관광자원화와 교육적 자료가치에 더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다. 고택은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로 이를 관광상품화 하는 것은 국내외 관광객 유치나, 역사문화의 잠재력이 있는 자원의 보존활용, 이미지 제고, 역사·문화·교육적 활용 등의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는 관광과 교육적 가치의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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