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 들어오던 푸른 대밭 장곡 죽전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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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 들어오던 푸른 대밭 장곡 죽전리마을
  •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0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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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26>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장곡면 죽전리 마을

냇가 중심으로 광천읍과 맞닿은 장곡면 죽전리마을
배다리·섬밭 등 바닷물 들어오던 때 지명 남아있어
깨끗하고 맑은 환경·냇가서 사라졌던 다슬기 돌아와
주민 간 한마음으로 단합하는 결속력 강한 장수마을

▲ 죽전리 마을 전경.

◇죽전리 마을 소개
장곡면 죽전리는 과거 바닷물이 들어왔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도 배다리나 섬밭 등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추론을 하게 하는 지명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40여 가구에 100명에 못 미치는 마을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마을 안까지 버스가 오가기 때문에 도로 포장이 잘 돼 있는 것이 특징이며, 마을 주민 대부분이 논농사 등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장곡면에 위치해 있으나 냇가를 중심으로 광천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축사가 거의 없어 깨끗하고 맑은 환경을 유지하고 있고, 냇가에서도 사라졌던 다슬기가 다시 발견되는 등 점차 더욱 깨끗한 마을로 조성되고 있다.
매년 8월 15일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는 등 단합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으며, 마을에 거주하다가 객지로 나간 사람들도 종종 방문하고 있다. 장수마을로 마을 주민들의 경우 7~80대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 마을에 위치한 고목과 주민들의 쉼터인 정자.

◇죽전리 마을의 역사
죽전리는 장곡저수지 아래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홍주 오사면의 지역으로 대밭이 많았다 해 대밭 또는 죽전이라 했는데, 현재는 대나무 밭을 찾아보기 어렵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중리와 죽상리, 가중리, 옥계리, 오동리 일부를 병합해 죽전리라 해 장곡면에 편입됐다. 1961년에는 죽전리를 1, 2리로 나눴는데, 한이마을에 장곡저수지가 생기며 마을이 사라지고 인구가 줄어 1989년 다시 하나의 행정리로 폐합했다.
광천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장곡면 죽전리, 서쪽은 광천읍 죽전마을(광천읍 내죽리 죽전)이다. 조선말기에도 두 마을이 각각 홍주와 결성에 속해 관할 고을이 달랐으며, ‘홍죽’, ‘결죽’이란 말이 생겼다. 장곡면 죽전리는 ‘홍죽’이다.
죽전리 마을의 앞은 ‘대밭들’이라는 넓은 농경지가 형성돼 있으며 지형적으로 광천천의 상류에 해당한다. 전해지기로는 100여 년 전까지 광천천을 따라 배가 들어 와 소암리에 배를 댔다 하고 죽전리에도 쪽배가 닿아다는 쪽다리, 배가 들어와 멈춘 곳이라는 배다리 등의 지명이 전해지고 있어 수백년 전 대밭들의 일부는 배가 다닐 만큼 큰 물길로 추측되고 있다.
광천천 수량이 지금처럼 줄어든 것은 장곡저수지를 막으면서부터인데, 이때 죽전리의 일부인 중상리 마을이 장곡저수지 부지로 수몰돼 마을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중리 뒷산에는 석재로 만들어진 고분이 있었고 도굴꾼들이 꼬챙이를 들고 산속을 뒤지고 다니던 모습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있다. 고분은 석판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주민들이 발견했을 때 이미 훼손이 심했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구루물 쪽에서 기와편도 많이 발견됐는데 지형이 바뀌고 민가 시설이 들어서 어떤 모양의 기와인지 알기 어렵다. 사찰이나 와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무렵 일부 지역 역지정리를 하던 중 배다리 논 땅속에서 침향목이 여러개 발견된 바 있다. 침향목은 약재로 쓰는 침향이란 나무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죽전리 침향목의 경우 고려시대 매향과 관련된 흔적일 가능성도 있다. 
죽전리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으로 지금의 대밭들 일대가 모두 바다였고 그중 쪽배를 대던 곳을 쪽다리, 배가 멈춘 곳을 배다리라 해 지금까지 지명이 그대로 전해지고 섬밭이란 지명은 이곳이 바다였을 때 작은 섬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시대 매향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에서 세력이 있던 집단이 내세를 기원하며 향나무를 땅에 묻는 의식이었는데, 죽전리에 ‘미륵재’라 칭해지는 곳이 있다는 점, ‘비선재’라는 지명 등도 매향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명칭이다. 
또 가까운 오성리와 인근 지역에서 선돌이 발견되고 인근 화계리 고분군도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주요한 사실은 죽전리에서 불과 1~2km 떨어진 광성 3리가 고려시대 여양현의 고을터였다는 사실이다. 전체적 지형을 살펴보면 죽전들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면 고을터인 광성 3리 입구까지 물이 차올랐을 것이고, 일대의 유력한 집단의 존재도 분명하다.

▲ 죽전리 마을회관.

◇3·1만세 운동과 한국전쟁
일제강점기 정태복, 김용재, 김동철, 고영관, 정해득, 이순용, 이재석 등 죽전리 사람들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해 화계리 매봉산에 올라 만세를 외치고 일본인들에게 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재석 씨는 각종 기록에 김재석으로 잘못 기록돼 있다.
정태복 씨는 장곡면의 초대 면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사문서위조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고 말년에 중리에 살며 서당을 운영했다. 그 외 은행나무뜸의 김관제 씨, 윤뜸의 윤상구 씨가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가송리 최기만 씨 집에서도 글을 가르치곤 했다. 광복 후에도 집안 형편 때문에 취학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서당 운영이 계속돼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전쟁시기 죽전리는 조용한 편이었다. 인근에서 참혹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죽전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없었다. 다만 어떤 이가 이유없이 실종돼 현재까지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죽전리에서 참전한 사람은 이상호, 정창수, 김동진, 이금영, 이우영, 황덕순 등이다. 월남전에 파병된 이들은 염규홍, 이의호, 이문의, 김대일 등이다.

▲ 마을 경주 김씨 후손들이 세운 세거지비.

◇죽전리 마을 문화와 풍습
예로부터 화계리 사람들은 죽전리를 칭할 때 ‘물아래’라 부르고, 죽전리 사람들은 화계리를 ‘물위’라 불렀다. 
광천천을 경계로 칭한 것으로 추정되나 저수지가 생긴 후 실제로 저수지 상단에는 화계리, 아래에 죽전리가 자리 잡은 형태가 되자 사람들은 참으로 묘한 일이라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물아래와 물위 사람들은 명절만 되면 편을 나눠 죽전리 개천 옆 모래밭에서 씨름판을 벌이고 함께 놀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논농사를 위해 일손을 돕던 두레 전통도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죽전 1리와 2리가 각각 두레를 따로 조직했는데, 1960년대에는 동네사람 전부가 함께 하던 두레는 사라지고 이웃간 품앗이로 농사를 지었다. 명절과 절기마다 농촌마을에서 행해지던 전통 민속은 고령화 등으로 현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수년전에도 정월보름 어른들은 풍장을 치고 아이들은 쥐불놀이를 했으나, 젊은 사람이 없어 활기가 사라졌고, 풍장소리도 끊긴지 오래다.
1970년대 초에는 새마을 사업을 벌이며 만든 자금으로 마을 전답 1200평을 만들었다. 죽전리 사람들이 1년씩 돌아가며 농사를 짓고 수익 일부를 동네 기금으로 적립했다. 농토가 적고 살림이 어려운 사람들부터 시작해 순서대로 돌아가며 경작했다. 죽전리 자산은 이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혼례나 상례를 치를 때 주민끼리 상부상조하고 상주가 약간의 사례금을 동계에 내놓으면 이것을 모아 기금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죽전리 앞을 흐르는 광천천을 동네에서는 ‘대밭냇갈’이라 불렀다. 이 물로 농사를 짓고, 집집마다 생활용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홍수가 지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한없이 가물어 물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아침에 눈을 뜨면 물꼬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식전에 이웃간에 싸우는 소리가 들릴 때가 많았다. 
물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곳곳에 보를 막아 중리보. 하니보, 큰보, 쏵새보, 밭디보, 뚝너머보, 새보, 돌논보, 갱이보 등 수많은 보가 만들어졌다. 냇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둠벙을 파고 물을 품어 썼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구수둠벙, 도깨비둠벙이라 하는 지명이 남아있다. 홍수가 날 때면 피해가 커 집이 떠내려간 일도 있었다. 1960년대에는 영세민을 동원해 둑을 막고 하천 주변을 정리했는데 품삯으로 당시 외국으로부터 구호물자로 받은 밀가루를 나눠주기도 했다.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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