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과 작은집으로 배치된 아산 외암리 참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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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과 작은집으로 배치된 아산 외암리 참판댁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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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6>
▲ 외암리 참판댁 안채 전경.

조선 숙종때 학자 이간, 설화산 형상을 따 호를 ‘외암’이라 지어
외암마을 예안이씨 세거지, 마을의 이름도 호를 따 외암이라 해
규장각 직학사와 이조참판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집
참판댁 종부로만 제조비법 전해지는 임금에 진상한 연엽주 전수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外岩里)의 외암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곳으로 500여년의 전통을 잇고 있다. 전형적인 전통마을의 정체성을 지키며 설화산에서 흘러내린 돌로 쌓아올린 돌담길이 자연과 어우러져 낭만과 풍요를 자아내고 있는 마을이다. 외암리 마을 동쪽에 위치한 이 고택은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외암리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500여 년 전 강씨(姜氏)와 목씨(睦氏)가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에 예안이씨(禮安李氏) 이사종(李嗣宗)이 이곳에 살고 있던 진한평(陳漢平)의 맏사위가 되고,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李挺)이 낙향하여 정착하면서 외암마을은 예안이씨 세거지가 되었다.

외암(巍巖)이란 마을 이름도 이정의 6대 손이며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간(李柬, 1677~1727)이 설화산의 형상을 따서 자신의 호를 ‘외암’이라 지었는데, 그의 호를 따서 마을의 이름도 ‘외암’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에 한자를 간편하게 바꿔 ‘외암(外岩)’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외암마을에는 외암리 ‘참판댁(參判宅,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8번길 47-23, 중요민속문화재 제195호)’이 있다. 19세기 구한말(舊韓末) 규장각(奎章閣)의 직학사(直學士)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이정렬(李貞烈, 1868~1950)이 고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집인데, 이 고택을 ‘참판댁’이라 부른다. 이유는 이 집을 지은 이정렬이 이조참판을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이 집은 예안이씨 문정공파 참판댁 종손인 이득선(李得善, 1941~ )과 연엽주 빚는 비법을 전수 받은 부인 최황규(崔晃圭, 1943~ ) 종부가 지키고 있다.

 

▲ 고종황제가 내린 아호편액 ‘퇴호거사’.

■옛 조상들의 생활방식 그대로 읽는 집
이 고택은 큰집과 작은집으로 구분하여 배치되어 있다. 큰 집은 열 칸의 ‘ㄱ자’형의 안채와, ‘-자’형으로 이뤄진 다섯 칸의 사랑채가 있다. 그리고 ‘-자’형 여덟 칸의 문간채가 사랑채 앞에 마주하며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은집은 여섯 칸으로 된 ‘ㄱ자’형의 안채와, 일곱 칸으로 된 ‘ㄱ자’형의 사랑채로 구성돼 있다. 큰집의 평면 구성은 대체적으로 중부방식을 따랐지만, 작은집 사랑채는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풍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섯 칸의 사랑채를 마주하고 있는 큰 집 대청 툇마루 위에 걸려있는 ‘퇴호거사’란 편액이 눈길을 잡는다. 퇴호 이정렬은 이사종의 11세손으로 그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인 관계로 명성황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정렬은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했던 것이다. 당시에 고종황제가 현재의 집을 하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퇴호(退湖)’란 호(號)도 고종황제가 내린 아호임을 편액에는 적고 있다. 사랑채에는 ‘(高宗皇帝)고종황제 (賜號)사호 (退湖居士)퇴호거사 (英王九歲書)영왕구세서’라는 현판이 내 걸렸다. 즉 고종황제가 호를 내리고 영왕이 9살(1905년)에 쓴 것이다. 이때부터 이정렬 공은 ‘퇴호(退湖)’라는 호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어쨌든 이정렬은 고종황제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참판댁의 큰집 솟을대문의 대문간 앞으로는 양편에 돌담으로 둘러쌓았다. 이 돌담이 솟을대문의 앙편 날개와 같이 비스듬히 펼쳐져 있으며, 이 돌담은 문간채의 끝을 향해 타원형으로 쌓여져 있다. 돌담 안에는 돌로 아래를 쌓고, 위를 옹기로 마감을 한 멋진 굴뚝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돌담과 옹기굴뚝, 솟을대문이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멋진 공간을 연출한다. 또 사랑채를 보면서 우측 끝을 돌면 일각문으로 만든 중문이 있다. 중문에 붙여 낸 광채와 사랑채는 ‘역 ㄴ자’ 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안채는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아 튼 ‘ㅁ자’형의 구성을 이룬다. 막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은 안채는 두 칸의 부엌과 안방이 있고, 윗방에서 꺾어 두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건넌방을 두었는데, 앞으로는 툇마루를 꺾어놓아 연결을 하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만들고 작은 화단을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탈하게 꾸며져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아무튼 참판댁의 권위를 나타내는 행랑채보다 높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는 대문 정면에서 좌측으로 빗겨 위치하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평행 배치가 아니기에 들어서는 사람은 오히려 중문 쪽으로 시선이 가는 반면, 사랑채에서는 행랑채가 쉽게 바라보인다. 이러한 배치는 사랑채의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출입자를 적절하게 살피도록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행랑채는 다른 곳과 달리 툇간(退間, 원칸살 밖에다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을 두었는데 이곳에서만 보이는 구조로 행랑채의 활용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만든 것 같다. 이득선 종손에 따르면 툇간 중 동측 한 칸은 마구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겨우 소나 말 한 마리만 들어가는 이러한 마구간은 다른 곳에는 없는 특이한 구조로 건축돼 있다. 아마도 집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뜻에서 필요한 면적을 할당한 듯해 보인다.

한편 이 집의 전체적인 특징은 돌담으로 공간을 구획한 것인데 대문간 앞으로 돌담을 내쌓아 집안으로의 진입로에 깊이감을 주며 중문간 앞의 아담한 마당, 장독대 주위의 나지막한 돌담은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집안의 살림살이도 비교적 그대로 보존되어 사랑채의 가구배치 등은 옛 우리 조상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읽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집에 정원시설이란 따로 찾아볼 수 없지만 대문으로부터 사랑채와 중문간, 안채에 이르기까지 징검돌이 놓였다. 이것은 남도지방(南道地方)에서 흔히 생활의 편의상 쓰는 방법이라고 한다.

 

▲ 참판댁 솟을대문.

■종부에게만 전해지는 연엽주 제조비법
현재 이 집에서는 충남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아산 연엽주(蓮葉酒)를 전통방식에 의해 제조하고 있다. 연엽주는 연잎을 곁들어 쌀과 찹쌀 누룩을 이용해 빚는 술로, 연꽃잎을 넣어 독특한 향기를 내기 때문에 연엽주라고 한다. 연엽주는 외암리 마을에 살고 있는 예안이씨 가문에서 익혀 내려온 양조기술에 의해서 제조된 술이다. 외암리마을 참판 이정렬의 4대조인 이원집(1829∼1879)이 쓴 ‘치농(治農)’이라는 필사본에 연엽주의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 방법에 따라 전수자인 최황규 종부가 술을 제조하고 있다.  참판댁의 종부로만 제조방법이 전해진다는 연엽주는 원래는 집안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가양주다. 이 술을 퇴호 이정렬이 고종황제에게 진상을 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연엽주는 퇴호의 4대조인 이원집(李源集, 1829~1879)이 처음으로 제조를 한 이후, 종부에게로만 전승이 되어왔다고 한다. 가양주로 빚는 술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빚을 때는 목욕재계 후, 의복을 단정히 하고 수건으로 입과 머리를 감싸야 한다. 술독을 옮길 때도 손이 없는 방위를 택하는 등 마을에서 제를 지낼 때 제관이 지켜야하는 금기사항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연엽주는 연잎과 솔잎, 누룩, 감초, 멥쌀과 찹쌀 등을 사용해 만드는 청주다. 가문의 제사 때 올리는 제주로 빚어오던 술이다. 1990년대 중반쯤 종손의 막내아들 대학 학자금 마련을 위한 방편으로 일반인에게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상에 올리던 술을 일반 사람들에게 판다는 것이 마음 편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의 형편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종부인 최 씨의 설명이다. 지금도 종택을 찾는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연엽주를 빚는 데 있어서 누룩이 특히 중요한데, 밀뿐만 아니라 녹두, 옥수수 등을 사용한다고 한다. 연잎은 가을철 서리가 내리기 이전, 잎이 마르기 전에 채취한다. 제철에 사용하기도 하고, 말려두었다가 수시로 사용하기도 한다. 해마다 연잎을 일정량 채취해 사용하는데, 다 사용했을 때는 연뿌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연엽주를 위해 연 농사도 짓고 있다고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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