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충청도의 첫 순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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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충청도의 첫 순교 터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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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5>
▲ 월계천변의 참수터 순교지. 이곳은 복자 황일광 시몬 등 신자들의 목이 잘린 순교지이다.

홍주, 충청도 최초 순교자의 치명 터·순교자 212명 신앙의 증거 터
조양문 밖의 월계천 주변, 백정이었던 복자 황일광의 목이 잘린 곳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는 모래가 쌓이는 생매장 터
원시장 베드로와 사촌 형 원시보 야고보 깊은 신앙의 신자로 존경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는데, 바로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가야산 앞뒤의 열 고을은 홍주를 비롯해 결성·해미·서산·태안·덕산·예산·신창·면천·당진 등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설명대로 내포지방은 지형상 바다와 가까워 곳곳에 뱃길이 발달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내포는 외래문화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내포지방이 천주학을 빠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해 신앙의 못자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중에서도 홍주는 충청도 최초 순교자의 치명 터이자, 병인박해 때까지 순교자 212명이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잃은 곳이다. 복자 반열에 오른 원시장(베드로, 1732~1793)·방 프란치스코(?~1799)·박취득(라우렌시오 1769~1799·)황일광(시몬, 1757~1802)이 바로 이곳에서 거룩한 피를 흘리고 하느님 품에 안겼던 것이다.

 

■홍주성 전체가 순교의 현장 신앙의 터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당시 천주교 교우들은 체포된 이후 이 문을 통해 홍주성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교우들이 이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들을 맞는 곳은 진영장으로, 지금은 통신사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이곳은 조선 시대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천주교를 믿느냐는 질문이 떨어졌을 것이고, 그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안회당으로 보내져 본격적 심문을 받았던 것이다. 안회당으로 가는 길목은 저잣거리였다. 20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길목에는 상가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홍주아문을 정문처럼 두고 있는 홍성군청 건물 뒤편에는 안회당이 있다. 순교자들이 문초를 겪던 곳이다. 이곳에서 복자 박취득은 1400대 넘게 매를 맞았고, 황일광도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으스러질 정도로 잔인하게 매질을 당했다.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안회당 뒤뜰에는 순교자들의 피를 머금은 땅에서는 푸른 잔디의 빛과 함께 붉고 흰 꽃들이 사계절 피어오르고 있다. 안회당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홍주감옥이 있다. 모진 문초를 받고도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고초는 계속됐다. 복자 원시장·방 프란치스코·박취득도 이곳에서 순교했던 것이다. 한편 원시장은 이 감옥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얼어 죽게 하는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당시에 옥터 밖에는 신비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감옥 옆에 있던 이 우물, 원시장이 바로 이 우물물을 뒤집어쓰고 얼어서 목숨을 잃었다. 홍주성에서 약물로 유명했던 우물물은 고문을 받다 정신을 잃은 순교자들을 깨우는 용도로 사용됐다고 한다. 매질을 당하고 고초를 겪은 신자들에게 정신을 차리도록, 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뿌려댔을 이 우물의 물줄기에 목을 축였을 신자들이다. 긴 잠에서 깨어난 이 우물은 과연 그때의 고통스런 비명을 기억하고 있을까.

조양문 밖에는 월계천이 흐른다. 그리고 월계천 주변에는 대교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복자 황일광의 목이 잘린 곳이다. 황일광은 백정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인간적 애덕을 느낀 그는 자신에게 천국은 이 세상과 후세 두 곳이라며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황일광의 진술에는 이미 두 번째 천국을 맞이하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지점인 합수머리에는 모래가 쌓인다. 바로 이곳이 생매장터다. 모래는 파기도, 묻기도 쉬워 이곳에 홍주성 안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 또한 묻혔다고 전해진다. 이곳의 생매장터를 내려다보면 자연스레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을 되새기게 된다.

 

▲ 참수터 순교지에 조성된 대교공원.

■충청지역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
홍주성 홍주목사 동헌에서는 박해시대 때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지도층 신자들이 문초와 갖은 고문을 받았던 곳이다. 충청도에서 공주 다음으로 많은 123명이 순교의 꽃을 피운 홍주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면서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또한 공주 황새바위에서 자신의 팔을 물어뜯으며 신앙을 증거한 성 손자선(토마스)도 홍주 거더리 신리 출신이다. 이렇듯 1866년과 이후 2년 동안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는데, ‘치명일기’에 기록된 숫자만도 8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예순이 넘어 순교한 사촌형제가 원시보와 사촌동생 원시장이다. 그래서 천주교 순교성지로서 홍주 동헌을 이야기할 때 충청지역 최초의 순교자였던 원시장 베드로(1732~1793)의 일화는 빼놓을 수 없다.

55세 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61세의 나이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는 홍주 ‘응전리’(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의 ‘응정리’)에 있는 부유한 양민(良民) 집안에 태어났다. 본래 성품이 인색하였지만 천주교 신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주변 사람들을 보살피는 등 후덕하고 인자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후 원시장 베드로는 사촌 형인 원시보 야고보(1730~1799)와 더불어 깊은 신앙의 신자로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의 길을 갔다. 원시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희사하는가 하면 금요일마다 금식을 지키는 등 온갖 덕행을 몸으로 실천했다.

그의 신심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는 1795년 무렵, 주문모 신부를 만나지만 그는 성사를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이 첩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으러 돌아오자 바로 첩을 내보냈다. 그리고 1798년 체포되어 홍주, 덕산을 거쳐 청주에 도착할 때까지 무수한 고초를 당했다. 덕산관아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진 그에게 온갖 혹형이 가해졌다. 그는 결국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7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이었다. 그의 생애가 끝났을 때 시신은 영롱한 빛에 휩싸였고, 이를 본 일가친척 50여명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고 한다.

1791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홍주목사는 원시장 베드로를 잡아들여 배교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배교를 거부한다. 온갖 문초와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원시장 베드로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가족의 소식을 전하며 가족의 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배교하면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으니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원시장 베드로는 “자녀들 이야기를 들으니 제 마음이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는데, 어찌 그분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홍주목사는 원시장 베드로를 매로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령한다. 종일토록 매질은 가해졌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자 다시금 찬물을 끼얹어 얼려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러한 명령 이후에야 원시장 베드로는 기도를 하면서 몸에 뒤덮어 쓴 물이 얼음으로 변하면서 얼어 죽음으로써 순교를 했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 혹한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1784년 한국교회가 창설되고 약 7년 후 소위 진산 사건으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1791년 12월 8일 전주에서 참수되므로 한국 최초의 박해가 시작된다. 이 신해박해의 여파로 이곳 홍주에서 원시장(베드로)이 체포되어 이듬해 1792년 12월 17일에 순교하여 충청도의 최초 순교자가 된다. 원시장을 비롯한 홍주지역 초기 순교자들의 행적을 볼 때 1780~1790년대에 이미 홍주, 예산, 당진, 합덕, 면천, 덕산, 청양, 보령 등지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순교시기를 초기, 중기, 병인박해로 나누어 순교자들을 살펴볼 수 있다. 초기박해의 순교자들(1791~1801)은 홍주의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1792)에 이어 1797년 정사박해 때 면천 여름이 출신의 방프란치스코와 2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179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있다. 또한 신유박해(1801)때는 홍주의 백정출신 황일광(시몬)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윤바오로, 한토마스 등이 순교한다. 따라서 박해초기의 순교자는 모두 8명이다. 이 가운데 원시장, 방프란치스코, 박취득, 황일광 등 4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을 받았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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