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박해와 독일 상인의 남원군 묘 도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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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박해와 독일 상인의 남원군 묘 도굴사건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2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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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7>
▲ 가야산 자락에 자리한 남원군 묘.

홍주지역 실학자들 천주교수용자 많아 문인들 중심으로 확대
내포지역 정조 8년(1784) 천주교회 창설, 수많은 순교자 발생
예산 간양골과 양촌 공소(公所)설정 홍주지역 천주교박해 혹독
조선과 통상요구 독일 상인 오페르트, 덕산 남연군묘 도굴실패



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썼으며, 천주교도를 박해했을까. 왜 해미읍성에서 천주교도들이 죽어가고 전국적으로 8000여명의 신자들이 순교했을까. 그것은 바로 남연군묘, 즉 대원군 아버지의 묘인 남원군 묘를 서양 사람들이 도굴한데서 기인할 수 있겠다. 대원군이 처음부터 서양 사람들을 미워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들을 박해하게 된 동기는 서양 사람들은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문호를 개방하려 하지 않자, 이를 타협하기 위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원군의 시신을 도굴하여 대원군과 협상하려 했던 것이다. 홍주지역은 이익의 후손인 여주이씨 일가의 실학자들 중에서 천주교를 수용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고, 그들의 사우(師友)나 문인들을 중심으로 확대됐다. 대표적으로 이가환은 서양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외숙이 되고, 이벽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부친 이용휴(李用休)의 제자 권철신과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순교(殉敎)했다.

이밖에 이승훈이 정조 15년(1795) 예산에 유배되었던 연고와,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충남일대에서 포교활동을 벌여 특히 예산지방에서는 다수의 천주교 신자가 나타났다. 순조 1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 당시에는 덕산 출생의 황필(黃泌)이 희생됐고, 광옥은 체포됐다. 황필은 덕산 출신으로 서학에 심취해 서양인에게 세례를 받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위해 활동했다. 광옥은 제사라는 것은 일체무익하다며 천주교를 전도했던 인물이다. 또 정조 22~23년(1798~1799) 호서(湖西)일대의 박해 당시에 이지현(李止玄)이 순교하기도 했다. 이외에 신유사옥과 관련해 처단된 일반 신자들이 상당수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천여명의 신자들이 각지에 흩어져 교회재건운동(敎會再建運動)을 했다.

이에 순조 11년(1811) 또 다시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잡혔는데, 이때 홍주·덕산·해미 등지에서 14명의 천주교 신자가 잡히는 등 끊임없이 순교자가 발생했다. 한편 내포지역에는 정조 8년(1784)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으며, 각처에 교우촌(敎友村)이 생겨나면서 천주교가 활발히 전파됐다. 이에 따라 고종 14년(1877) 9월에 입국한 두세(Doucet, 정가이 丁加彌) 신부가 고종 20~21년(1883~1884) 천안·아산·당진·서산·공주·부여·논산·서천 등지를 방문할 때 예산의 간양골(현 예산읍 간량리)과 양촌(현 고덕면 상궁리)을 방문해 이곳을 공소(公所)로 설정했다. 따라서 홍주지역에서는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홍주를 중심으로 다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될 수 있었다. 

 

▲ 구만포구.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고종 5년(1868)에는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est Oppert)가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사건이 있었다. 바로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고종 3년(1866)에 2차에 걸쳐 우리나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오페르트는 고종 5년 4월에 제3차로 한반도 답사를 계획한다. 미국영사관에 근무했던 미국인 모험가 젠킨스(Jenkins)를 자본주로,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Feron)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고 680톤의 기선 차이나호(The China)에 60톤의 소증기선 그레타호(The Greta)를 붙여 백인 8명, 말라야인 20명, 한인 천주교도 수 명을 비롯해 약 100명의 청국인을 승무원으로 해 상해를 출항했다.
이들의 항해 목적이 무엇인지는 그들의 최고 간부 이외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젠킨스가 후일 재판소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첫째, 조선왕국과 통상조약 체결을 교섭하자는 것이고 둘째, 조선왕국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지구일주여행을 시키자는 것이며, 셋째 이같이 함으로써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진의와 실제 행동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북독일연방의 국기를 계양하고 일본 나가사끼를 거쳐 1869년 4월 17일 저녁에 충청도 홍주의 행담도(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 정박했다. 그들은 행담도에서 소증기선 크레타호에 옮겨 타고 삽교천 상류로 항해, 다음날인 18일 오전 11시경 구만포(현 예산군 고덕면)에 상륙했다. 구만포에 내린 일행은 동행한 최일선이 이미 덕산군의 천주교도 김여강 등 8명과 접선하여 일행을 인도했다. 그들은 러시아군대라고 말하면서 덕산읍내를 통과할 무렵 덕산군수 이종신과 부하들의 제지를 받았으나 큰 충돌 없이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의 남연군묘로 향했다. 그들은 자칭 러시아군이라 소리치며 덕산군아를 습격한 다음 오후 5시 목적지인 남연군묘에 도착했다. 그들은 쇼벨 4자루와 곡괭이로 남연군묘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덕산군수 이종신과 묘지기와 몇 명의 주민들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했으나 무장한 서양인들의 위협과 행패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파묘 작업은 쉽지 않아 마을에서 곡괭이와 지렛대 등을 구하여 관곽을 파괴하는 작업을 했으나 5시간이 경과해도 퇴토의 일부를 떼 내는 정도였다. 즉 4월 18일 밤 10시 30분경이었고 그들은 다음날 새벽 1시가 지나서 관곽의 석고 벽까지 파들어 갔으나 관곽의 벽이 워낙 견고해 예정시간보다 12시간이 경과한 상태에서 중단하고 말았다. 날은 밝아오고 구만포에 정박시켜 둔 그레타호가 썰물이 되면 도주할 수 없으므로 지체 없이 철수했다. 본래 경기도 연천군에 있던 남연군묘를 이곳에 이장할 때 거액을 들여 암반을 파서 관을 안치하고 무려 300포의 생석회에 흙을 섞어 물과 혼합해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도굴단은 4월 19일 오전 6시 구만포로 다시 돌아와 그레타호를 타고 삽교천을 이용, 차이나호가 정박해 있는 행담도로 향했다. 그들은 퇴로에도 서슴지 않고 만행을 감행해 하리후포에서는 민가를 습격 약탈을 자행했다. 하리후포는 지금의 당진시 우강면 부장리 하리마을로 추정된다.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하리마을은 삽교천 수로가 강폭이 좁아 도굴단은 썰물 때 삽교천 하류방향으로 퇴각하면서 무모하게 민가에 침입해 약탈했으리라는 추측이다.
 
 

▲ 구만포구 옛 모습.

■천주교의 수난과 대학살 그리고 활성화
천주교는 정조(正祖) 때 많은 남인학자들에 의해 신봉되기 시작했다. 이승훈(李昇薰)은 북경에서 서양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승훈을 따라 이가환(李家煥), 정약전(丁若銓), 권철신(權哲身) 등 당시 소외됐던 남인의 시파(時派)학자와 신분적으로 불만을 가졌던 중인 이하의 서민과 부녀자들이 신자가 됐다. 하지만 천주교의 유행은 가부장적 유교질서사회에서 조정의 정책을 통해 다스려졌다. 즉 정조 10년(1786)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해 서적의 수입 등을 국법으로 금했다. 그런데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模)가 들어온 후로 교세는 점차 커져 신자가 4000명으로 늘었다. 이러한 가운데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다시 천주교에 대한 금압조치가 내려졌다. 이때 이승훈, 권철신, 주문모 등이 사형을 당했고 정약전, 정약용 등이 유형에 처해졌다. 이때 황사영(黃嗣永)은 북경에 있던 서양인 주교에게 백서(帛書)를 보내 구원을 청하려다 발각돼 사형에 처해졌다. 헌종(憲宗) 5년(1839)에는 천주교에 대한 금압정책이 다시 내려졌다. 이 조치로 서양인 신부 3명과 많은 신도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마카오신학교에서 돌아온 김대건(金大建)신부가 활약하다 역시 순교했다. 이러한 금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교세는 날로 늘어갔다. 철종 때는 신도수가 5만 여명으로 늘었고, 제천에 신학교가 설립될 정도로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됐다. 그러나 대원군의 집권기에 이르러 또다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계속됐다. 고종 2년 12월 29일에는 천주교 신자인 홍봉주(洪鳳周)의 집을 급습 가택을 수사했고, 고종 3년 정월 5일에는 김장운(金長雲)과 베루누 주교의 사환이던 이선이가 체포됐다. 이후 9일 밤에는 수많은 포교(捕校)들이 재차 홍봉주 집을 포위해 앞서 체포당한 이선이를 앞세워 베르누 주교와 홍봉주를 체포 하옥시켰다. 11일에는 남대문 밖 정의배(丁義培)집에서 주인 정씨와 우세영, 브레티늬르 신부를 체포 하옥했으며, 13일에는 볼류와 도오리 두 신부가 용인(龍仁)과 황주(黃州)에서 각기 체포됐고, 15일에는 남종삼(南鍾三)도 고양군에서 체포 투옥됐다.

21일에는 남종삼과 홍봉주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당했고, 4명의 선교사는 노량진 사장에서 참수 당했다. 이처럼 대원군 집권기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학살은 처참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이처럼 국가의 금압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천주교가 활성화되고 있던 현실에서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막으면서 찾으려 했던 조선의 자주성에는 그만큼 한계가 있었다. 148년 전 남연군묘 도굴사건(오베르트 도굴사건)이후 서해대교를 통과하는 관광객들이 쉬었다 가는 행담도휴게소는 엉뚱하게도 오셔파크리조트(Ocean Park Resort)로 일방적인 개명을 했다. 지금도 당진시민들은 행담도에 갔다가 곧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서평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기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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