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현장 거창사건추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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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현장 거창사건추모공원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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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평화인권공원(가칭)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7>
▲ 경남 거창군 신원면의 민간인 집단학살(517명) 장소인 박산골짜기. 바위마다 총탄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1951년 육군 11사단 9연대 ‘견벽청야 작전’에 양민학살
주민 700여명 모두 모아 박산골짜기에서 총탄 집단학살
거창출신 신중묵 국회의원 제54차 국회본회의에서 폭로
1995년 법률통과 1998~2004년 위령사업·추모공원 완공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9일, 신원면 청연마을에 들어온 국군은 공비를 토벌한다며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고 공비가 아닌 주민들을 논밭으로 끌어내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차별 난사 학살했다. 이때 희생된 청연마을 주민이 84명에 이른다. 이렇듯 거창민간인 학살사건은 15세 이하의 남녀 어린이 359명, 16세~60세 300명, 60세 이상의 노인 60명 등 남자 327명, 여자 392명 등 무고함 양민 719명이 당시 11사단 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 등의 국군 병력의 총검에 무지막지하게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는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주둔했던 국군 제11사단 9연대의 연대장 오익경 대령과 3대대장 한동석 소령의 휘하 국군은 2월 11일, 전날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서 끌고 온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집합하게 한 후 군인, 경찰, 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나머지 주민들 520여명을 인근 박산골짜기로 몰아넣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이렇게 3일간 세 곳에서 이유도 없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학살된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많은 노인과 아녀자,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719명이나 되었다. 그 중심에는 스물다섯 살의 육군 소령 한동석이 있었다. 이후 이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거창출신 신중묵 국회의원에 의해 제54차 국회 본회의에서 이 사건은 폭로됐다.

이후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하여 이 사건의 전모를 조사하려고 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로 가장하게 하여 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감추려고 했다. 이후 다시 시작된 국회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넘겨져 실형(9연대장 오익경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 10년, 소대장 이종대 무죄, 계엄민사부장 3년)을 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군부정권의 특사로 모두 9개월에서 1년 6개월 만에 석방되어 복직해 화려한 공직생활을 보냈다. 당시 사단장 최덕신 장군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훗날 장관을 지낸 이후 월북했다.

▲ 거창사건추모공원 전경.

■거창 양민학살 특별조치법과 보상 논란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란 1951년 육군 제11사단 9연대가 ‘견벽청야(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은 초토화시킨다) 작전’에 따라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경남 거창군 신원면 지역 양민 700여 명을 모두 모아 마을 뒤 산골짜기에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이 국회에서 거론되자 이승만 정권은 1951년 파견된 국회조사단을 거창 신원면 입구에서 당시 계엄 민사부장이던 김종원을 시켜 기총소사를 퍼부으면서 조사 자체를 무산시키려 했다. 이후 들끓는 여론에 밀려 관계자 3명을 사형 등 사법처리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으나, 몇 개월 후 이들은 모두 사면을 받고 복권됐다. 유족들은 다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주민들이 나서서 유골을 모아 위령비를 세우고 묻었으나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 금기를 명하고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탄압했으며 묘지도 개장령에 따라 다시 파헤쳐졌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주민성분 조사에 참여했던 신원면장 박영복 씨를 타살하고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18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1988년이 되어서야 희생자 위령 궐기대회를 갖고 위령비를 다시 세울 수 있었으며, 1996년 국회는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1996년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됐으나 보상 관련 조항이 제외되는 등 많은 미비점이 지적됐다. 정부 측은 이미 시효가 지나 국가 배상 의무가 소멸했다는 입장이나, 희생자 유족들은 공소시효를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 산정해야 한다며 2001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에 2002년에 일부 국회의원들이 거창사건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며, 2003년 10월 서울대 법대 교수들은 명예회복만 규정한 현행 특별조치법을 개정,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법률개정안을 제출한 바 있다. 그리고 2004년 3월 실질적인 보상을 규정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사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고 6·25한국전쟁 관련 배상법 안이 잇따라 통과되면 국가재정에 큰 부담이 된다’는 등의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법안은 지난 제17대에 이어 제18대 국회에도 제출됐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돼 2012년 5월 30일 출범한 제19대 국회에서 통과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창원지법 진주지원은 ‘국가는 유족들에게 40만 원씩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으나, 이후 항소심에서 부산고법은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 1961년 군사정부가 글자를 정으로 조아 묻었던 위령비를 땅 속에서 꺼내 받침대에 걸쳐놓은 모습.

■거창 민간인 집단 학살사건과 추모공원
경남 거창사건추모공원을 찾아가는 길은 1084호선의 작은 고개 밀치를 넘어가면 함양과 수동으로 가는 길과 산청과 신원으로 가는 59호선 삼거리, 감악산물맞이길 안내도가 나온다. 그 앞에 펼쳐지는 마을이 1951년 2월 9일 일부 국군이 처음으로 주민들을 집단학살한 청연마을이다. 이곳에서 84명의 마을주민들이 숨졌는데, 김운섭(남·9세), 김운출(남·2세), 정영자(여·10세), 김미순(여·2세), 김경순(여·4세) 등 다섯 명이 기적같이 살아나 당시의 비극을 전했다. 마을 건너편에는 거창사건 희생자 제2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비석에는 한결같이 ‘졸 1951년 2월 9일’로 되어 있다. 2월 10일에는 ‘탄량마을’에서 100여명이 집단학살 됐고, 2월 11일에는 박산골에서 517명이 학살됐다.

박산골에서는 문홍준(남32세), 정방달(남46세), 신현덕(남23세) 세명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이곳에서 신원면 소재지를 지나 ‘합동묘지’가 나타나고 맞은 편 건너로 ‘거창사건추모공원’이 보인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 신차로 2924(대현리 551)에는 총 부지면적 16만2000여㎡(4만9133평) 규모의 합동위령시설인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있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거창의 불행한 사건으로 알고 있는 거창양민학살사건의 현장이 있는 곳이다. 1951년 2월 10일 한국전쟁 중 신원면에서 일어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95년 12월 18일 국회에서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통과해 1998년 합동위령사업을 시작해 2004년 추모공원을 지어 완공함으로써 반세기가 넘어 국가가 잘못을 인정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거창 명승지의 역사와 전설(거창문화원)’과 거창추모공원교육관 박기수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신원면의 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시작됐다. 민가 78채가 불타고 주민 84명이 숨졌는데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 5명이 당시의 정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2월 10일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며 과정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로 집결시켰다. 와룡리 주민 100여 명을 집결지로 데려오는 도중 대현리 탄양골에서 집단 사살했다. 2월 11일 날이 밝자 군인·경찰·공무원 가족만 가려낸 다음 517명을 과정리 박산골로 끌고 가서 무차별 사격하고 죽은 시체 위에 솔가지를 덮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다른 지역에서도 주민 18명이 학살을 당하는 등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총 814가구의 1583채가 불탔고 719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였다.

1951년 2월 11일 신원면의 하루는 그렇게 무참하게 저물어갔다. 속절없는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고 우여곡절 끝에 1954년 신원면 주민들은 박산골에 방치돼 있던 학살현장의 유골을 수습했다. 누구의 유골인지 구분할 수 없어 어른남자, 어른여자, 아이로만 구분해 뒷산에 묻었다. 1960년 5월11일 박산 합동묘역 석물 운반 작업 중에는 분노가 폭발한 주민들이 면장을 살해하는 또 다른 비극이 생기기도 했다. 1960년 11월 18일 신원초등학교 옆 언덕에 남자합동지묘(109구), 여자합동지묘(183구) 두 개의 봉분을 만들고 아이들 유골(235구)은 봉분 없이 소아합동지지라고 표시해 두었다.

하지만 1961년 5·16군사정부는 박산합동묘지의 개장명령을 내리고 묘역에 세운 위령비는 글자를 정으로 쪼아서 뭉갠 다음 땅에 파묻어버렸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의 열풍이 불자 유족회는 땅속에 묻혀 있던 위령비를 꺼내 비석 받침대 위에 걸쳐 놓았다”는 설명이다. 박산골 합동묘소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이 거창사건추모공원이다. 추모공원에는 추모문, 천유문, 위패봉안각, 위령탑, 부조벽, 묘역, 조각, 역사교육관 등이 있다. 거창양민 학살사건은 거대한 추모공원보다 박산골 합동묘역과 지금도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깨진 위령비가 불행했던 한 시대의 역사를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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