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순교터 6곳, 순교1터 증거터 홍주목사 동헌
상태바
홍주순교터 6곳, 순교1터 증거터 홍주목사 동헌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7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9>
▲ 홍주순교성지 신앙증거터 홍주목사의 동헌 표지석. 비석 뒷쪽으로 홍성군청과 안회당이 보인다.

홍주, 임진왜란·동학농민항쟁·홍주의병·천주교박해 등 역사현장
안회당 뒤편 서남쪽 ‘근민당’ 천주교 박해를 한 동헌으로 유명
대원군 휘호 문액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 읍민들 반대로 보존
홍주 옥 터 앞 우물, 천주교박해 때 기적을 보인 신비의 우물

 

서해의 관문이자 홍주목의 치소를 둘러쌓은 홍주성은 1772m에 달했으나 현재는 810여m의 성벽만 남아있다. 홍주목의 36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현재는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다. 홍주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발굴조사 결과 홍주성역사관 뒤편의 토성이 나말여초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홍주성은 조선 초기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석성으로 쌓은 이후 몇 차례의 중축을 거쳤다.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동학농민항쟁, 천주교박해 등 홍주 땅의 산 역사의 현장이며,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한 민종식, 김복한, 이세영 등이 홍주의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정각은 6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년의 느티나무와 홍주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다.
 

▲ 홍주목사 동헌인 안회당.

■홍주 천고락지 지형이라 병화가 잦아
충남 서북부에 자리한 홍주(洪州)는 해안선을 연접한 서해(西海)의 관문(關門)이며, 도성(都城)의 인후(咽喉)로, 예로부터 국방의 요새일 뿐 아니라 해로를 통해 멀리 중국을 왕래하던 요지로 꼽혔던 곳이다. 충남 서북부 일대의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백제(百濟)가 웅주(熊州)와 부여(扶餘)에 정도(定都)했을 때는 물론,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는 동안 홍주성(洪州城)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성(山城)과 인접한 지역인 해미의 성(城)을 지각(枳殼)성과 석성, 그리고 외각에 다시 도랑을 파서 물을 돌린 것은 홍주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처음 이 성곽을 쌓은 기록은 없고, 다만 최초로 성의 주위가 1300척의 토성(土城)으로 성첩(城堞)이 400에 불과했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백월산 중복(中腹)에 해풍현(海豊縣) 고을이 있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고을을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에 홍주성을 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이후 순조(純祖, 1800~1834)때 한계수(韓桂洙)가 수성(修城)했다는 기록과, 당시 홍주목사 이헌규(李憲圭)와 영장 김계묵(金啓默)이 방백들과 의논해 순조 23년(1822) 8월에 2350척(舊尺)으로 확장,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종 7년 경오(庚午, 1870)에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연봉금(捐俸金) 3000냥과 원납금(願拉金) 및 지세부과금(地稅賦課金)을 합쳐, 석성(石城)으로 개축하기 위해, 남포(南浦)에서 30명, 보령(保寧)에서 20명, 온양(溫陽)에서 15명, 서산, 태안, 해미, 결성, 덕산, 청양(靑陽)과 비인(庇仁) 등지에서 각각 석공(石工) 10명씩을 동원해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해 석축(石築)한 동시에 650개의 첩(堞)과 130개의 치(雉), 2개의 곡성(曲城), 천(泉) 4개소와 지(池)를 설치한 다음, 동서에 수문(水門)을 둬 서문천(西門川)의 물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 물은 서편 수문에서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南門川), 금마천(金馬川)으로 흘러가게 했고, 동서북 세 곳에 문을 다시 세우고, 남문은 홍예문(洪霓門)으로 경오(庚午)년 2월 27일에 준공한 다음 조정에 보고해 같은 해 10월 15일에 대원군이 휘호(揮毫)한 문액(門額)을 받았는데,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이다.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남문은 문루(門樓)가 없고 그 밖의  문에는 모두 문루가 있으며 조양문의 문비(門扉)는 철판이었고, 서북남문의 문비는 판목(板木)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풍수가들이 홍주는 천고락지(天鼓落地)지형이라고 해서 그랬는지, 병화가 자주 있었다. 백제(百濟)와 고려의 대전(大戰)을 포함해 16차에 걸친 왜구(倭寇)의 침공, 최충헌(崔忠獻)의 차자 최향(崔珦)의 반란, 선조 때 이몽학(李夢鶴)의 반란, 갑오(甲午)동학란, 병오(丙午) 홍주의병 항일전은 홍주성만이 겪은 전란일 것이다. 그러나 홍주성의 성곽은 의연한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홍주에 이주한 일본교민이 1913년에 서문을 철폐했다. 1915년에는 북문을 철훼한 다음, 동문마저도 철훼하려 했으나 홍주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게 됐으나 성곽은 곳곳에서 헐리기 시작했다.
 

▲ 홍주성 동헌 뒤에 있는 여하정.

■ 동헌 안회당 목조건축의 미 뛰어나
안회당(安懷堂)은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헌인데도 유일하게 동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홍주성과 홍주아문, 안회당이 사적 제231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 안회당은 홍주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으로 ‘안회(安懷)’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회당은 동헌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동헌과는 달리 위엄이 있어 보이는 높은 지붕에 넓은 대청이 보이지 않는다. 안회당이 처음부터 동헌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회당 뒤편서남쪽에 ‘근민당’이라는 동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근민당은 천주교 박해를 한 동헌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 근민당이 어떻게 해서 유실되고 대신 안회당이 동헌이 되었는지는 명확치가 않다. 다만 안회당이 1977년 해체 복원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전에는 근민당이 동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회당은 모두 22칸으로 조성된 목조 팔작집으로, 숙종 4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후, 고종 7년인 1780년 목사 한응필이 개축했다고 한다. ‘ㄱ자’형으로 건축된 안회당은 정면 7.5칸에 측면 2.5칸 정도이며, 건물 좌측 끝에는 꺾이어 나온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 방은 모두 두 칸의 마루방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정자처럼 꾸몄다. ‘안회당(安懷堂)’이라 쓴 편액을 대원군이 하사했다고 하는데 ‘원판’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홍주성(洪州城)은 1945년 8·15광복 이후에 정부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1972년 10월 14일 산성과 조양문, 홍주아문 등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1973년 국비 250만원을 투입 조양문 주변의 가옥 37동을 매입 철거하고, 토지 687평을 매수했다. 1975년 국·도·군비 1441만8000원을 들여 홍주동헌의 해체공사 후 1978년 국·도·군비 1500만원을 들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홍주아문도 보수했다. 한편 1978년 10월 7일 홍성지역에 강도 5.2°의 지진이 발생해 성곽의 일부가 붕괴돼 이를 계기로 보수계획을 수립, 국비 1억4600만원을 지원받아 성곽주변의 가옥 64동을 철거하고, 대지 3446평을 매수했다. 1979년부터 ‘홍주성보수정화계획’을 확정해 810여m의 성곽복원과 성곽외부 4790평의 정화와 2.5m폭의 산책도로 개설 등의 계획을 수립, 국·도·군비 1억5000만원을 들여 성곽의 보수·복원공사에 착수했다. 1981~1982년 2개년에 걸쳐 국·도·군비 4500만원을 투자 성곽 보수공사를 실시했고, 또한 1983년 국·도·군비 3000만원을 들여 성곽 주변의 잔디와 안내판, 표석 설치 등을 완료했다. 또한 최영 장군, 성삼문 선생, 한용운 선사, 김좌진 장군의 흉상을 세워 구국충절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홍성군은 홍주성 복원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총사업비 3866만7800만원을 투입, 2005년부터 시작된 홍주성 복원사업을 2025년까지 완료, 홍성을 역사문화관광의 중심도시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1단계로 2009년까지 홍주성역사공원 및 주차장 등 편의시설 등의 조성과, 2단계로 2010~2014년까지 홍주성에 위치한 각급기관을 이전함과 동시에 도로포장, 조경 등의 기반시설을 완료했다. 또 3단계로 2015~2020년까지 홍주성 성곽보수, 동헌, 내아, 책실 등 홍주목사 관련시설물 복원, 2020~2025년까지 4대문(동·서·남·북문)과 행정집무시설, 객사 등의 복원과 민속마을, 놀이마당, 공예촌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한편 홍주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역사공원 조성사업은 옛 법원·검찰청 부지 1만 5300㎡의 면적에 홍주 옥 터 복원, 우물터 복원, 전통 정자 설치, 산책로 조성 등을 통해 천년홍주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옥 터 앞의 우물 터 복원은 1860년대 병인박해 당시 홍주의 순교자들이 1400대를 맞는 등 아무리 매를 쳐도 죽지 않아 교수되거나 동사했는데, 죽기 전이나 후에 맞은 상처가 금방 회복되는 등의 ‘기적을 보였다는 신비의 우물’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