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동학농민군, 홍주의병으로 변모해 활동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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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동학농민군, 홍주의병으로 변모해 활동 계속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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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22>
▲ 홍주동학농민군은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뒤 해미성으로 퇴각해 3000여명이 집결했다. 사진은 해미성 전경.

만해, 동학농민군과 의병이 죽는 모습 보며 벼슬을 않기로 결심
아버지와 형이 동학농민군의 토벌과정에서 갈등 홍주의 집 떠나
동학혁명·갑오경장에 비분강개 1896년 설악산 오세암으로 입산
홍주성전투 퇴각한 동학군들 해미성에 집결한 인원은 3000여명

 

홍주의 동학운동사서 홍주출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의 관계에서 만해의 아버지 ‘한응준이 동학운동 당시 중군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에 주목한다. 한용운의 아버지와 형은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정산에서 홍주의병을 일으켜 남포와 홍주를 점령하였으나 패했다는데 방점이 찍히는 대목이다. “동학농민군과 을미의병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충훈부도사라는 벼슬을 지낸 한용운(유천은 본명)의 아버지 한응준은 조정의 명을 받고 큰 아들 윤경과 함께 관군이 된다. 열여섯의 유천은 괴롭다. 옳은 것은 동학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농민군들의 길이었음에도 수없이 죽어가는 농민군과 의병 등을 보면서 벼슬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또한 을미의병으로 마음속으로는 의인, 걸사를 흠모하며 현실에서는 임금의 명령을 따라 그 반대의 길을 가야 했던 아버지를 여의고 형마저 행방불명이 되자 한용운은 번민을 거듭하다 절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라는 것이 지역 향토사가의 견해다. 만해 한용운은 고종 16년(1879년) 7월 12일에 충청도 홍주 결성의 박철마을에서 태어난 뒤 일곱 살 때 홍주면 남문동으로 이사했다. 열네 살이 되던 해 홍주 학계마을에 사는 전영주(全永周)의 셋째 딸 정숙(貞淑)과 결혼했다. 하지만 십여 년간 한문공부를 하던 한용운은 1894년 열여섯 살 때, 하급관리였던 아버지가 형과 함께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는 과정에서 홍주의 집을 떠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해, 부친·형 동학군 가담 갈등 입산계기
한용운 평전에는 “만해의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이며, 본명은 정옥(貞玉)이다. 8~9세에 천자문(千字文)과 대학(大學), 서전(書傳)을 통달하여 신동이란 소문이 났다. 1892년 열 세살에 2년 연상인 부잣집 딸인 전정숙(全貞淑)과 결혼하고 5년 뒤에 집을 나갔다. 열여덟에 뜻한 바 있어 서울로 향하다가 설악산의 고승 얘기를 듣고 입산하였다. ‘에라,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라는 결론을 얻고 내설악 오세암에서 부목행자 생활을 하면서 불교의 초심과목과 불교내전을 환하게 깨달았다.

다시 뜻한 바 있어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통해 보다 넓은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시베리아 기행을 떠난다. 길을 떠나는 도중 안변 석왕사에서 박한영 선사를 만나 수선(修禪)하다가 서울을 거쳐 다시 고향 홍주로 되돌아온다. 폐허가 된 고향에서 7년 동안 아내와 세속생활을 하다가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다시 집을 나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용운은 1892년 전정숙과 결혼해 사회운동가로 월북한 아들 한보국을 낳고 출가했다. 이후 1933년에는 진성당병원의 간호사였던 유숙원과 재혼해 딸 한영숙을 뒀다.

만해의 행상(行狀)을 기록한 ‘만해 한용운대선사비(卍海 韓龍雲大禪師碑)’가 서울 종로의 원각사(圓覺寺)터(탑골공원 또는 파고다공원)에 있다. ‘서력 1879년 고종 16년(光厚) 기묘 음력 7월12일 충청도 홍주목 주북면 옥동(玉洞)(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충훈부도사(忠勳府都使)인 한응준(韓應俊)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니 본관은 청주요, 어머니는 온양 방(方)씨다. 누대의 사족으로 할아버지 영우(永祐)는 훈련원 첨정(僉正)이고, 증조할아버지 광후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만해가 진술한 조서에 따르면(경성지방 예심계 예심판사 영도웅장(永島雄藏)의 조서) 만해의 출생지는 홍주면 남문리로 밝혀져 있다. 또 그의 아버지 한응준은 홍주목의 중군 참모로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해야 하는 지방군의 중견장교였다. 그런데도 이 비(碑)에는 아버지 한응준과 형 윤경이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으며, 만해 역시 18세의 어린 나이로 홍주호방을 습격하여 군자금 1000냥(또는 3000냥)을 탈취했다고 하나 역시 확실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한용운은 부친과 형의 동학군 가담에 대한 갈등과 번민으로 고향의 처가에서 잠시 은신하다가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가 1894년 동학혁명·갑오경장을 겪고 비분강개해 1896년 설악산 오세암으로 입산했다. 한용운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껍데기만 남게 되던 해, 백담사에서 연곡과 만화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득도해 정식으로 머리를 깎는다. 승려가 된 한용운은 5년 동안 불경공부와 참선에 집중하다가 일본의 힘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5개월 정도 일본 각지를 돌아보고 돌아온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던 해, 홀연히 바랑 하나 짊어지고 북간도와 시베리아를 떠돈다. 불경공부와 교양서적을 탐독하고 서양문물과 근대사상에 관심을 갖게 돼 세계정세를 살펴보려 연해주를 돌다가 만주를 거쳐 고향인 홍주로 돌아왔다. 북간도와 경성을 오가며 조국독립의 길을 찾는 동안, 어느덧 민족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한용운은 1919년 민족대표의 1인이 되어 3·1 혁명의 중심에 서게 된다.

 

▲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의 만해생가지 일원.

■동학, 신분제 타파·인간평등사회 실현
아무튼 홍주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0월 28일(양 11월 25일) 동학농민군의 홍주성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일본군의 기록에는 “여기서(홍주성에서) 적을 격퇴, 적 수천 명을 살상하고 그 거괴 이창구(서산사람), 이군자(면천의 거괴) 등 2명을 죽였다”고 했다. 아무튼 쟁쟁한 접주들과 젊은 동학군들이 수백 명 몰살당했으니 동학농민군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다음날인 29일(양 11월 26일)에는 날씨마저 흐렸으며, 동학군은 사정거리를 벗어나 원거리에서 포위하며 대포만 쏘아대고 있었다. 반면 일본군과 관군은 유인작전일 줄 알고 홍주성문을 한 발짝도 나서지 않은 채 동학군들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이때 동학군 쪽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우선 전투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잠자리가 없어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옷도 얇아서 추위에 떨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식량도 확보되지 않았으며, 식사공급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이로 인해 굶는 인원이 많았던 것이다. 한편 많은 사상자를 처리할 대책도 없었기 때문에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적을 공격할 의욕마저도 상실되면서 결국은 동학군 스스로 홍주성 공격을 포기하면서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홍종식은 “실상은 홍주에서 관군과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닙니다. 관군들은 홍주성 문을 튼튼하게 닫고 지구전을 펴기로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오래 대항하기가 어려워서 스스로 물러나 퇴각했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따라서 일부의 동학군들이 서로가 흩어지기 시작하다가 29일 오후에는 모두 떠나 버렸던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11월 26일(양) 적은 세 방면에 엄호병만을 남기고 1500여 되는 응봉고지로 퇴각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오후 4시 30분경 패잔병을 응봉으로 모아 퇴각했다. 이때 빙고언덕의 패잔병은 제외됐다. 오후 5시 빙고언덕의 패잔병을 비롯한 적들도 덕산통을 거쳐 해미방면으로 퇴각했다. 그래서 1개분대의 홍주관군을 보내 추격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흩어진 동학군들은 해미성과 면천 쪽으로 나뉘어 퇴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동학군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관망하고 있던 보수 세력들은 앞 다투어 유회소를 만들고 동학군 소탕에 나섰던 것이다. 예산 대접주 박희인도 동학군들과 함께 덕산 쪽으로 가다가 유회소에서 발포하자 모두 흩어져 산길로 도망했다. 산 속에서 이틀 동안 숨어 있다가 11월 2일에야 덕산 막동(幕洞)의 김원형(金元亨)의 집에 당도했던 것이다.

홍주성 전투에서 퇴각한 동학군들 중에서 해미성에 집결한 인원은 3000여명 정도였으며, 귀밀성(貴密城)과 도루성에 집결한 인원은 400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호우선봉일기’에는 홍주에서 물러난 동학군 4~5만 명은 덕산 역말과 예산 역말에 주둔하다가 해미로 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적정을 탐색하며 전진하는데 적도 4~5만 명이 예산 역촌과 덕산 역촌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보고를 받자 곧 추격해 보니 해미성으로 물러갔다”고 하였다. 장위영(壯衛營) 영관 겸 죽산부사(竹山府使)인 초토사(招討使) 이두황은 홍주(洪州)에 가서 관군과 합동작전을 펴기 위하여 10월 29일에 출발하였다. 11월 6일에 덕산까지 당도해 동학군의 동태를 탐문했던 것이다.

이렇듯 동학은 1860년에 창도된 이래 신분제 타파를 부르짖으며 인간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중에서 제일 먼저 조선왕조의 기둥이었던 신분제를 부수는 일을 하였다. 따라서 동학군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양반을 조롱하거나 모욕을 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으나, 일반의 민중들이나 천민들을 대하는 몸가짐이나 태도는 겸손하고 친밀하기 그지없었다는 점과 이들 농민군들이 홍주의병으로 변모해 활동을 계속했다고 전해지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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