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순교성지 3처, 증거 터 홍주진영장의 동헌 경사당
상태바
홍주순교성지 3처, 증거 터 홍주진영장의 동헌 경사당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18 14: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11>
▲ 홍주성 4대문의 동문인 조양문 뒤로 보이는 KT건물이 홍주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천주교순교자들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와 고문
천주교 전래초기 100년, 정부의 대규모 탄압받아 순교자 탄생
박취득, 곤장 1400대나 맞고도 8일간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해
“난 굶겨도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

 

홍주순교성지의 3처인 ‘경사당’은 조선시대 때 홍주진영장의 동헌이었다. 천주교 순교자들은 대부분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와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했다. 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 결국 옥에 갇히게 되곤 했다. 신자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하며, 죽어도 천주를 버릴 수 없다고 강력히 신앙을 증거 한 그런 장소다.

다리뼈는 부러져 갈기갈기 찢어졌고, 살점들은 형리들의 얼굴에 파편처럼 튀었으며, 부러진 등뼈는 가죽을 뚫고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배교한다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는 유혹이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위협했다. 하지만 홍주의 순교자로 시복된 ‘하느님의 종’인 박취득 (라우렌시오)은 “죽음을 당할지언정 제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굳게 신앙을 증거 했던 것이다. 매를 맞아 뼈가 부러져 살을 비집고 나온 몸으로, 피가 터져 묵사발이 된 입으로, 순교자들은 신앙고백을 철저히 했던 것이다. “천주를 믿나이다, 네 천주를 믿나이다”를 수없이 외친 신앙의 증거 터가 바로, 천주교홍주순교성지에는 3곳이나 있다.

이렇듯 한국의 천주교를 이야기할 때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자발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 100년 동안 정부로부터 대규모의 탄압을 받으면서 무수한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이 순교의 역사는 한국의 천주교가 가장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순교야말로 최상의 종교적 봉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천주교홍주순교성지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새끼줄에 졸려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
홍주의 천주교 순교사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박취득 라우렌시오다. 박취득은 지금의 당진시에 속하는 홍주의 면천 땅에서 태어나 복음의 진리에 대해 듣고, 서울로 올라가 지황(사바)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 했다. 박취득은 다시 고향땅으로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 당시 수많은 배교자도 있었는데, 당시 면천 고을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박취득은 교우들이 여러 달 옥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자주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면서 그들이 배교하지 않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옥중에 있는 교우들이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나타나 과감히 관문을 열고, 면천 군수 앞에 큰 소리를 질렀다.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옥에 가두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 이 말 한마디에 박취득은 곧바로 체포됐으며, 그의 목에는 칼날이 씌워졌다. 형리들이 그에게 혹독하게 매질을 했으나,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박취득은 항상 불우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수없이 돌봐준 사람이라서, 읍내사람들로 하여금 대단히 호평을 얻고 있었다.
 

▲ 홍주순교성지 진영장의 동헌터 비.


관장은 그를 함부로 단죄하지 못하고 멀리 보냄으로써, 귀찮은 존재를 물리쳐 버리려고 한다. 그 결과 박취득은 해미와 홍주관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잔인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용맹히 주를 증거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옥에서 풀려난 그는 원시보(야고보), 정산필(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등 열심인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복음전파와 교리실천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2년 뒤 충청도 땅에 정사박해가 시작되자, 하늘의 도움을 얻고 자진하여 면천관아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관장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국왕과 관장들이 금하는 나쁜 도를 따르느냐”고 묻자 “예, 저는 나쁜 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을 숭배하라는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저는 천주님을 흠숭하고, 임금님과 관장들, 부모님과 다른 웃어른을 공경하며, 제 친구와 형제와 은인,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즉시 투옥 시키라고 명했다. 이후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초는 형벌과 함께 시작됐는데, 박취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 부활과 승천, 재림에 대하여 덧붙여 설명했다고 한다. 일곱 달 후에 신관(新官)이 부임하자, 네 번째로 문초가 있었다. 신관은 배교하고 나가라고 회유하자, 증거자는 여전히 “천주는 첫째 아버지이시고 만물의 최고 주재자이시므로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새 군수는 이때 ‘저 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려운 사건을 맡기가 귀찮아 책임을 모면 하려고 감사의 허락을 청하여 홍주진영으로 다시 이송했다.

홍주진영에서 여러 달 동안 영장 앞에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는데, 고문 후에는 진땅에 버려두기도 하고, 밤새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게도 했다. 이 무렵 박취득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모친에게 써 보냈다. “불효자식 라우렌시오는 옥중에서 어머니께 제 심정을 알려 드립니다. 저는 항상 천주를 지성으로 섬기고, 부모께 효성을 다하며, 형제와 화목하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천주의 명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저는 천주께 많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부모와 형제에게 저희 본문을 다하지 못했고, 특히 삼구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 제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삼촌과 형님, 형수에게도 잘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발현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어느새 박취득에게 승리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곤장을 1400대나 맞았고, 8일 동안을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옥졸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옷을 벗겨 등에 찬물을 끼얹고 내버리기도 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밤사이에 교우들이 몰래 그에게로 가서 약간의 음식과 물을 주었는데, 영장과 형리들은 물론, 그를 바라 본 사람들은 살아있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옥중에 있던 천주교인 11명도 이를 보았는데, 의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았던 그가 옥으로 옮겨 놓자 몇 시간 후 스스로 일어나 칼을 벗고 감방으로 들어가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옥졸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튿날 옥졸들이 잠든 사이에 교우들이 박취득 에게 다가가자 그는 조용히 일어나 교리를 이야기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제 그의 모든 상처는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옥졸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 광경을 보고는 요술이라고 생각하고, 쫓아가 옥에서 새끼줄로 목 졸라 죽였다. 이때가 1799년(기미년) 4월 3일 오전 11시, 그의 나이 30세였다. 영광스러운 종은 이렇게 순교하였던 것이다. 18개월 동안 박취득은 순교의 여정에서 하루도 고문을 당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의 발자국은 핏물자국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육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형벌에 저항할 수 있을까? 이렇게 박취득은 용감히 순교하여, 고향땅의 신앙공동체를 지켰던 것이다.


■순교와 순교자 행적 끊임없이 상기해야
홍주지역의 천주교순교자들 중에서 원시장(베드로), 방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은 지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으로 선정 되었다. “내 떠날 때, 내 주님의 훈계를 좋은 마음으로 받아 지성으로 따라서 행하여라. 떠나도 너희를 자주 생각하여 그리워하고,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구하고, 너희 영혼의 신익(神益)을 항상 돌아볼 것이요, 멀리서라도 통공(通功)하는 은혜로 너희 가운데 있음과 같으니, 나를 생각하여 너희 본분을 열정으로 지켜라” 제5대 조선 교구장인 다블뤼 주교가 남긴 마지막 회유문(廻諭文)이다.

한국가톨릭에서 순교의 의미에 대해 홍주성지성당 최교성 신부는 “신앙을 증거 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일로 순교는 엄격히 말해서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하여 초래되어야 하며,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행위인 순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끊임없이 상기함으로써 한국 천주교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에서는 매년 9월을 한국 순교자 성월로 지정,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행적을 기리는 달로 지켜오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